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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 조디악 (2007)-누명 씌우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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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 조디악 (2007)-누명 씌우기는 없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2.05.09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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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이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영화들이 제법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조디악>은 그보다 한 발 더 나갔다.

‘실제 수사 기록에 기초했다’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영화는 1968년 미국의 한 대도시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마 조디악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런 류의 영화에 관객들은 몰입감이 더할 수도 있고 덜 할 수도 있어 선호가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영화적 완성도 측면에서는 하나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왜 그런지는 간략하게 내용을 살펴보면서 풀어보자.

몇 차례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당연히 범인을 잡기 위해 전담팀을 꾸린다. 잠재적 동성애자나 흑인이라는 등의 추측이 난무한다.

그러나 실체는 오리무중이다. 그런 가운데 살인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범인이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몸을 드러내고 자수한 것이 아니라 편지로 그렇다고 내가 진범이라고 떠벌이고 있다. 전 국민이 다 알 수 있도록 말이 아닌 언론에 공개한다.

신문사에 암호를 보내고 싣지 않으면 12명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사건 이후에는 다음 사건을 예고한다. 간혹 대형 사건이 터지면 정신병자 가운데 일부는 스스로 하지도 않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나 대부분 해프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경우는 좀 다르다.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공개되지 않은 세세한 부분까지 다 밝히고 나서니 수사한 수사관은 편지를 보낸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 짓지 않을 수 없다.

▲ 신문사에서 일하는 주인공 제이크 질렌할(오른쪽)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범인을 잡기 위해 머리를 쓰고 있다.
▲ 신문사에서 일하는 주인공 제이크 질렌할(오른쪽)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범인을 잡기 위해 머리를 쓰고 있다.

그러나 묘책은 없다. 지문도 없다. 필적감정이나 몽타주도 실패로 돌아갔다. 더구나 그가 보낸 암호문은 해독이 어렵다.

살인의 동기도 뚜렷하기 않다. 동기가 없으니 그만큼 해결이 어렵다. 분명 거리를 활보하면서 다음 타킷을 물색 중인데 잡을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다.

연일 언론은 예고 살인이 맞아 떨어지자 속히 잡으라고 닦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불안한 시민들 역시 무능한 경찰력을 질타한다. 급기야 CIA, FBI 등과 공조 수사를 펼치지만 진척은 없다.

범인은 아랑곳 없이 스쿨버스까지 공격한다고 한 술 더 뜬다. 신이 난 범인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범행을 이어간다. 패턴을 찾는 것도 난망하다.

단순강도나 우발적인 살인, 숱한 사고사 가운데 그가 연루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시간은 흐른다.

그 사이 범행은 뚝 끊긴다. 아무리 잔혹하고 흉측한 범죄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다. 이제 조디악 사건은 흘러간 뉴스가 됐다.

그러나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희생자 가족이 아니라 신문사 삽화가 그레이스미스( 제이크 질렌할)는 과거 기록을 한 자리에 모으면서 범인에서 한시도 눈을 돌리지 않는다.

경찰도 그의 끈질긴 추적과 과학수사에 혀를 내두르면서 협조를 한다. 공권력도 포기하다시피한 사건에 그토록 매달리는 그레이스미스의 열정이 놀랍다.

신문사 선배(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열정적으로 범인을 좇았으나 이제는 나가 떨어졌다. 범인과의 싸움에서 지고는 알코올 중독자가 됐다. 폐인으로 겨우 생명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레이스미스는 추격을 멈추지 않는다. 그에게는 자녀가 있고 사랑하는 아내도 있다. 수사관도 아니면서 일은 제쳐 두고 가족마저 소홀히 대하니 예쁜 아내는 몇 차례 경고를 보낸다. (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보는 공식이다.)

그러나 삽화가는 그만두지 않는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범인을 잡는 것이 그만큼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는 아니다.

그에게 이혼장을 던지고 떠난다. 이쯤되면 관객들은 경찰도 아닌데 너무 심하게 매달린다고 질타할 수 있다. 너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뒤로 빠져있으라고 충고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빠지면 영화는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감독은 주인공을 끝까지 범인과 대결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감독의 수완이라기보다는 영화 공식을 깨는 것이 영화적 완성도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잔인하거나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끔찍한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으로 긴장감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르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속 시원한 해결로 마무리되지 않아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관객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완성도는 볼수록 높아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실화다, 라고 시작하는 영화치고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명장면이 많다.

무엇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다음 장면이 앞선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종국에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굳어지기 때문이다. 보고 나서 감독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이것이 <조디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국가: 미국

감독: 데이빗 핀처

출연: 제이크 질렌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평점:

: 살인을 참는 게 너무 힘들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짐승을 죽이는 것보다 즐겁다. 내가 죽으면 지상낙원에서 내가 죽인 사람들은 내 노예가 된다.

이런 미치광이가 저지른 범죄가 장기 미제로 남았다. 이런 경우 신을 탓하기에 앞서 가짜 범인 만들기의 유혹에 경찰관들은 빠져들기 쉽다.

국가는 물론 지역사회, 언론 등 모든 입 가진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리기 때문이다.

세금 받고 뭐하느냐는 무능력에 대한 비아냥을 쏟아진다. 체면이 구긴 공권력은 누구든,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이 범인을 만들고 싶다.

실제로 가짜 범인을 세워 사건을 해결했다고 나선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누명을 씌워 무고한 범죄자를 만들어 내고는 비난의 손가락질을 피했다고 양심마저 피할 수 있을까.

<조디악>에서는 그런 모습은 강하게 어필되지 않고 있다. 그들이라고 해서 모욕을 끝내 참으면서 진범에만 매달리라는 원칙은 없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옷을 벗는 일이 있더라고 그들은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 선량한 시민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대신 되레 수 천 명의 용의자  혐의를 벗겨줬다. 공권력에 경의는 이런 때 표해야 한다.

누명 쓴 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안도의 숨을 쉬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 나서 모처럼 편한해 지는 기분을 느꼈다면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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