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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씨받이(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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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씨받이( 1986)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10.1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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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는 무지막지했다. 살기도 어려운데 죽은 자를 더 우대했다. 산 자들은 제사라는 이름 아래 조상 모시기에 온 힘을 쏟았다. 가난한 자든 부자 든 가리지 않았으나 위신과 체면을 중시했던 사대부들은 더 했다. 세도를 부리는 양반들은 제사를 통해 신분을 과시했다.

여기 한 명문 가문이 있다. 떵떵거리며 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 빠졌다. 바로 대를 이을 자손이 없다. 손자를 얻기 위해 문중 어른은 씨받이를 들이자고 결정했다.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는 씨받이를 구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떤 씨받이가 좋은지 ‘씨받이 감별법’을 두 남자가 주거니 받거니 음담패설처럼 지껄인다. 마치 어떤 종자가 이듬해에 파종하기에 좋은지를 고르는 것 같다.

씨받이는 존중받는 인격체라기보다는 밭에 뿌리는 씨앗에 불과했다. 그러니 그들이 며느리를 고를 때 쓰던 ‘여상법’을 들먹이는 것은 당연하다.( 참고로 ‘여상법’에 따르면 눈매가 길고 갸름하며 눈썹이 팔자 형으로 굽고 이마가 평평해야 아들은 잘 낳는다고 한다.)

송아지 사러 갈 때 품평의 기준을 따지듯이 그들은 씨받이를 구하러 가면서 여자의 값을 매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이름은 있어도 성씨가 없는 여자들만이 사는 동네다. 동네 입구에서 그들은 산세를 놓고도 거참 묘한 형상이라면서 여자를 빗대서 표현한다. 산과 들과 짐승과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여자는 단지 물건이고 돈을 주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만이 중요한 잣대이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는다. 맞은편에는 여자 셋이 간택을 기다리듯이 대기하고 있다. 뚜쟁이는 선택이 용이하게 왼편 아이는 올해 스물여덟으로 첫째는 딸을 낳았으나 둘째는 아들을 낳았고 유자상으로 보건데 한 군데도 허술한 데가 없다고 칭찬한다.

*돌멩이 하나에도 정주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옥녀의 인생은 처참했다.

가운데 아이는 갓 삼십으로 아들만 내리 셋을 낳았다. 사주에 아들만 칠 형제이니 아직 넷을 더 낳을 수 있다고 추켜세운다. 바른편 아이는 스물네 살로 재작년 물난리로 서방과 아들을 한꺼번에 잃고 옥문골에 온지 불과 석 달밖에 안 됐으며 왕부입자상으로 허우채 (화대)를 곱으로 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교접 시 피부와 입술, 상군의 변화가 어떠해야 하는지 떠들어 댄다. 노예를 검사하듯이 흥정 전 단계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이 세 명 가운데 양반네가 원하는 씨받이는 없다. 동구 밖에서 송아지를 쫓던 바로 그녀 필례의 딸 옥녀( 강수연)를 찿는다. 옥녀는 이제 열 일 곱살, 봉오리는 있되 만발한 꽃은 아니라는 참견에도 봉오리가 있으면 꽃은 피게 마련이니 후한 허우채를 약속하고 그들은 옥녀를 사 온다.

눈 가리개를 하고 가마에서 내린 그녀는 ‘듣보잡’ 유부남과 합방을 한다. 남자는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해서 종사를 잇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고 따지다가 “네 이놈, 인간이 대를 이어 조상의 근본에 보답해야지, 불효 막심한 놈”이라는 한 마디로 더는 대꾸하지 못한다. 종사를 잇자는 것이지 외도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숙부의 따끔한 질책이 매섭다.

네 놈이 죽으면 제사는 누가 지내느냐는 말에 종손은 그만 그녀와 정을 통하지 않을 명분을 상실한다.

그 순간 그는 사랑하는 부인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그러나 부인은 되레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합방하는 바로 그 시각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이어 곧 묘시이니 자리에 들라고 말하고 동터 올 무렵이니 어서 시작하라고 채근한다. 너무 깊지 않고 한치 두 푼 길이에서 끝내라는 말에는 웃음이 난다.

마지못해 시작했으나 남편은 차츰 옥녀에게 빠져든다. 마치 숫 사자 교미하듯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그 짓에 정신없다. 숙부는 사슴피까지 대령한다. 부인은 그때마다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문밖에서 보초를 선다.

방안에서 벌어지는 환희의 기쁨이 방 밖으로 전해진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처음에는 반대하던 남편은 이제 사는 맛이 이런 것이구나 새삼 느끼는 듯이  모든 것이 종사를 잇는 일이니 상것이라 해서 괄말라는 할머니 분부가 고마울 따름이다.

부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숱한 부부관계 전에 술 한 잔 먹고도 했고 대낮에 머리를 북쪽으로 베고도 했고 천일기도 후도 했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불평이 있을 수 없다. 남편은 이제 아내가 있는 내실에 발 길을 끊고 옥녀가 있는 별당에 머문다.

얌전하고 정숙한 부인과는 달리 뭔가 있는 옥녀. 돌멩이 하나에도 정 주지 말라던 어머니의 당부는 잊은 지 오래다. 마치 본부인처럼 서방님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당당하다.

그 옥녀가 임신을 했다. 노마님이 점지해준 잉태의 적합 시기에 합방한 결과인지 달의 정기를 받아들여 음기를 보충한 결과인지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사랑채를 드나드는 남자의 정성 때문인지, 친정엄마( 임형자)가 준 금줄을 끓인 물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아들 많이 난 집의 식칼을 훔쳐서 도끼로 만든 노리개를 허리춤에 붙여서인지 옥녀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떡 하니 낳는다.

진짜 부인은 주변을 속이기 위해 옥녀가 임신을 하고 입덧을 하고 배가 불러오고 출산하는 전 과정을 똑같이 재현했다. 누가 봐도 씨받이가 아닌 정부인이 임신하고 출산한 거다.

이제 옥녀의 일은 끝났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할 일이다. 백 프로 임무 달성이니 약속한 논 10마지 문서가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허나 그녀는 이 집을 떠나기 싫다. 맛있는 음식과 하녀들의 시중보다는 그사이 정이 든 서방님과 떨어지기 싫어서다.

천한 것이 귀한 양반의 자리를 넘보는 불경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 과연 옥녀의 삶은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까. 관객들은 조마조마하다.

국가: 한국

감독: 임권택

출연: 강수연, 이구순, 임형자

평점:

 

: 관객들은 옥녀의 행복을 빌었다. 그가 주인공이 아닌가. 모든 영화의 주인공은 비극보다는 희극이 더 폼난다. 그러나 감독은 그러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대궐 같은 기와집에서 쫓겨났다.

떠나기 전 한 번 아기 얼굴을 보자는 그녀의 소망은 철딱서니 없는 짓이라는 한마디로 무시됐다. 내 새끼 내가 데려간다, 난 새끼 낳아주는 짐승이 아니다, 라고 아우성쳤으나 메아리가 없다.

이제 그녀가 갈 곳은 여기서 오 백리 떨어진 전답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녀가 그렇게 했다면 씨를 받은 돈으로 평생 어머니와 잘살 수 있었다. 신분을 속이고 처녀 시집을 갈 수도 있고 또 다른 씨받이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옥녀는 그 모든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팔청춘에 애를 낳고 그 애를 남의 집에 빼앗기고(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남자와도 떨어져야 했던 그녀가 택한 곳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말고 귀가 있어도 듣지 말라는 충고를 허투루 들은 결과는 참혹했다. 육신이 사람 같다고 사람 대우받으면서 살려고 했던 그녀의 꿈은 무너졌다. 그녀는 흔들리는 그네처럼 나무에 매달려 생을 마감했다.

솔잎 먹던 송충이가 기름진 음식 맛을 보더니 정신이 돌았나 보다. 소 꼴을 먹이고 되는대로 사는 인생에서 한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로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로 짧았던 생을 살았던 그녀 옥녀. 씨받이 주제에 언감생심 서방님을 넘본 결과는 이랬다.

한편 조선이 얼마나 죽은 조상을 위했는지 영화에 나오는 대사를 잠깐 보자. 임진란에 백성들은 먹지도 입지도 못했다. 그래도 신주와 제기만은 한사코 짊어지고 다녔다.

피난의 와중에도 유랑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집이 불타면 제일 먼저 챙긴 것도 신주다. 위급한 어린 자식이 아니다. 효녀, 효부는 모두 이런 사람들이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빗대서 이런 말도 한다. 혼령의 거처는? 저승? 묘지? 사당? 종잡을 수 없다. 제사 지내려고 살았던 사람들. 강수연은 1987년 제44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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