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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8 15:11 (일)
314. 휴일(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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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휴일(1968)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9.0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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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감독의 <휴일>에서 서사가 제일 활발한 부분은(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허욱(신성일)이 술집에서 여자를 만나는 장면이다. 여기서 여자는 애인 지연(전지연)이 아니다.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다. 깔끔한 인테리어, 근사한 음악, 모던한 웨이터가 눈에 띈다. 화면이 돌면 조금 떨어진 곳에 여자가 잡힌다. 그녀도 술을 먹고 있다. 물론 혼자서.

남자가 일어나 여자에게로 간다.( 흔히 보는 수작질인데 이처럼 역사가 깊구나.) 양주병을 들고 남자는 여자의 잔에 술을 따른다.(잔도 먹음직 스럼다. 투명한 칵테일 잔이다.) 눈빛이 서로 마주친다.

잔을 들어 건배한다. (이 장면은 사랑 영화의 ‘왕 중 왕’이라고 불릴만한 <카사블랑카>의 잉글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가 서로 마주 보면서 건배하는 모습에 견줄만하다.)

우리들의 우울한 일요일을 위해서. 그러면 이렇게 맞받는다. 우울한 사람들이죠.

원샷이다.( 보기에 좋다. 하마터면 따라 할 뻔했다.) 원샷에는 원샷으로. 술을 보기 좋게 먹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빈 잔이 채워진다. 여자를 바람맞힌 그 남자를 위해서. 그러면 여자도 지지 않고 남자를 바람맞힌 그 여자를 위해서, 라고 대꾸한다.

다시 잔이 비워지고 채워진다. 우리들의 기막힌 내일을 위해서. 그려면 어제를 위해서. 그리고 바닥난 술병을 위해서. 흐음. 이런 대사를 주고받는 남녀라면 반드시 일이 터진다.

마지막 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오기 전에 아쉬운 듯 남자는 한 마디 보탠다.

아가씨의 가장 절박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갑자기 처지는 질문이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 ) 빈 병에 술이 채워지는 거죠.( 역시 남자보다는 여자가 한 수 위다. 버지니아 울프도 전혜린도 이런 상황에서 이런 대꾸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빨리 일요일이 끝나는 거죠. 긴 생머리의 젊은 여자. 술도 잘 마시고 옷도 세련됐다. (미니스커트가 잘 어울린다.) 약간 위로 올라간 눈꼬리와 오뚝한 코. 살진 입술,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눈동자. 이런 여자가 다음에 취할 동작은? ( 답변을 기다릴 틈이 없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그리고 담배. ( 폐 깊숙이 연기를 들이 마시지 못하고 뻐금하고 내뿜는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장면이다. 남자가 아닌 웨이터가 붙여준다. 남자는 언제나 성냥이 없다. 이 장면도 참 거시기 하게 좋다.)

여기서 잠깐 화면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 (화면의 교차도 세련됐다.) 이 곳은 황량한 바람이 부는 곳이다. 다른 여자가 추위에 떨고 있다. ( 다시 남녀에게로 와보자. 둘이 어찌 되는지 아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다.)

남자는 또 머저리, 바보, 천치 같은 질문을 한다. 아가씨는 남자와 자본 적이 있느냐. 이런 우문에 여자는 요즘은 애기 떼어 본 적 있느냐고 묻죠. (이때 여자의 시선은 남자를 떠나 초점 없이 먼 데를 본다. 노련하지만 헤프지 않다.)

주책없는 남자, 여전히 덜 떨어진 말만 해댄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이때 여자의 대답은 지금 술을 사는 거다. (캬, 이 정도 응수라면 100점 만점에 1000점은 줘야 한다.)

둘이 밖으로 나온다. 차와 경양식을 파는 아이엘 싸롱이 어른거린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을 잡는다. 잠시 휘청이면서. 술에 취한 듯하나 만취는 아니다.

여기서도 여자의 대사는 지금까지 이런 시나리오는 없었다, 라고 할 만큼 당차다. 일요일에 만나는 남자는 다 마찬가지다. 우울하고 말이 없고 용기 없고 아무 얘기도 약속도 없이 사라진다. 다음에는 언제나 나 혼자 남는다. 그리고 내일이 온다.

 

(아, 이런 여자라면 하루가 아니라 한 달 내내 술을 마셔도 간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

허욱은 한잔 합시다. 그제서야 정신이 온 듯 그런대로 봐줄 만한 대사를 내뱉고 둘은 송학 초밥집에서 연속적으로 원샷을 때린다. 언제나 일요일 아침이면 하루가 빨리 가기를 기다리면서 밤이 되면 초조해지는 일요일을 그냥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 배경 음악도 죽인다, 죽여.)

왕대포집, 안주일절, 곱창전골( 그때도 곱창전골이 있었다. 그때 먹는 곱창은 지금 먹는 곱창과 다를 것이다.) 로 이어지고 대취한 두 사람은 인근 공사판으로 파고든다. ( 그 이전에 남자는 여자를 벽에 밀어붙이고 입술을 가져가나 여자가 아래로 빠지고 남자는 벽에 키스한다. 이 장면도 놓치면 서운하다.)

아무리 취해도 할 것은 해야 한다는 기세로, 두 사람은 찾으면 반드시 있는 해야 할 곳에서 할 일을 엄숙하고도 진지하게 한다.

하필 그때 종소리가 울린다. 이때 울리는 종은 전투 개시를 울리는 신호탄이 아니다. 사형수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우울한 영혼을 위로하는 선율도 아니다. 마피아의 갱들이 벌이는 살인 행진곡도 아니다. 원죄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다. 그는 벌떡 일어선다. ( 그깟 종소리가 뭐라고.)

다녀와야 할 데가 있다는 이유를 대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여자는 말한다. 꼭 안 와도 좋다. 약속 안 지켜도 좋다. 우린 일요일에 만났으니까. (그래서 제목이 <휴일>이다. 아닌가?)

달리는 남자. 처음 시작할 때 나왔던 그 장소를 지나친다. 남자가 가는 곳은 병원. 임신 6개월의 애인은 의사 말에 따르면 수술해야 하지만 그것도 위험한 일이다.

결론을 미리 말하겠다. 애인은 죽었다. 그 이후에 남자는 애인 아버지를 찾아가서 얻어터지고 친구에게 맞아서 피떡이 되고 더는 일요일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중얼거리다 끝난다.

국가: 한국

감독: 이만희

출연: 신성일, 전지연

평점:

 

 

: 서두가 쓸데없이 길었다. 서두로 쓴 평은 영화의 중간 부분에 해당한다. 그러니 그 앞의 내용을 잠깐 언급해 보자.

휴일마다 애인을 만나는 남자는 날건달이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꼴에 멋이 잔뜩 들어 머리를 단장하고 옷은 바바리코트에 약속 장소에 나갈 때는 택시를 탄다.

거짓말로 운전수를 따돌리고 담배 가게 주인을 속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조금 다른 행동을 한다. 애인은 임신한 몸이고 낙태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친구를 찾아 병원비를 구하는 과정이 장황하다.

바람 부는 언덕 위 벤치( 심하게 바람이 날린다. 감독은 송풍기를 너무 세게 틀어 놓았다. 지나쳐도 봐줄 만 하다.)에 여자를 남겨 놓고 떠나는 남자.

그 전에 남자는 자신의 긴 코트를 벗어 여자에게 주지 않고 땅에 내려놓는다. (어떤 의미지?) 여자는 남자가 올 때까지 코트를 입지 않고 들고 있다.

남자는 돈을 꾸기 위해 여기저기 허둥댄다. 언제나 술에 취해 내일이면 취직이 된다는 희망고문을 하는 작자들을 비웃는 알코올 중독자. 여자와 같이 있는 친구도 마다하지 않는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술을 사러 가는 친구의 여자는 언행이 천해 보인다.

여자가 나간 사이 남자는 친구에게 정말 약혼자냐고 묻는다. 그러면 친구는 만약 저런 괴물이 내 약혼자라면 당장 쥐약을 먹겠다고 웃기지 말라고 한다.( 이 장면은 지난 회에 쓴 <안개>의 세무서장이 하인숙에게 그것만 가지고 결혼하려고 덤빈다는 표현과 엇비슷하다. 당시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의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장면을 밖에서 여자가 듣고 유리창을 깬다. 그리고 술은 니 돈으로 사다 쳐 먹으라고 고함을 친다. 멋진 복수.

여자가 떠나자 친구는 누구 애냐고 묻고 그 여자 자신도 누구 애인지 모르는데 니가 어떻게 아느냐고 따진다. 남자는 주먹을 내지르고 다른 친구를 찾아간다. 그리고 친구가 목욕하는 사이 돈과 시계를 훔쳐 달아난다. 그리고 그 돈으로 술을 마신다.( 이 장면은 맨 처음 언급했다. 영화에서 서사가 가장 활발한 부분이라고. 상황이 이런데 고급 술집에서 양주병을 들고 여자를 꼬드기는 남자의 심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휴일>은 이만희가 왜 대단한 감독인지 또 한 번 증명해 준다. 이 작품은 검열관의 검열에 걸려 상영되지 못했다. 2005년에 발견됐다고 한다. 놀라운 작품이 사라지지 않고 세상에 나온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의 최고 작품이라고 소문이 난 <만추>도 <휴일>처럼 거짓말 같이 어디선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한다.)

주인공 남자의 무기력, 아무리 해도 벗어날 길이 없는 가난, 불쌍한 여자, 영화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온통 절망뿐이다. 결혼식은 교회당에서 아이는 셋을 낳고 마당엔 채송화 백합 장미를 심는 꿈은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곧 날이 밝고 새벽이 온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없는 커피값이 갑자기 생길 리도 없다. 암울, 허무, 어둠. 그들에게 휴일은 결코 뷰티플 선데이가 아니었다.

검열관은 이 점을 주목했을 것이다. 그래서 감독보고 내용을 바꾸라고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남자가 머리 깎고 군대를 가거나 노력해서 고시에 패스 하거나 여자가 삵 일을 해서 돈을 억수로 벌거나 주변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일어서거나 뭐, 이런 기대를 품을 만한 것으로. ( 훈훈한 장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신성일이 속심수로 강탈한 파고다 담배를 인부들에게 하나씩 나눠 줄 때, 있어 보였다.)

그러나 감독은 그러지 않았다. 발견된 필름은 73분으로 짧다. 그래서 한 30분 정도가 잘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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