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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넘버3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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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넘버3 (1997)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6.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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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인생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뭔가 있어야 한다. 돈이나 배경은 기대할 것이 없으니 실력이 필요하다. 거기다 의리까지 있다면 가능성은 있다.

태규(한석규)는 깡패의 말단 조직원이다. 그에게는 일인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배워서 남 주기보다는 자기가 쓰려고 노력한다. 신문도 읽고 틈틈이 일본어도 배운다.

준비는 끝났고 기회는 우연히 찾아온다. 상대방이 차를 막고 막무가내로 치고 나온다. 전쟁이다. 지하 주차장 입구는 그 야말로 아수라장이다.

미리 준비한 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태규 쪽은 왕창 깨진다. 그러나 보스는 겨우 살아났다. 그런 보스를 해치기 위해 조필(송강호)이 병원을 급습한다.

그러나 태규가 막아선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일인자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는다. 거꾸로 매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는 의리를 지켰다.

히든카드를 숨겨놓은 보스는 내부 쿠데타를 진압했다.

태규는 인터넷과 인터폴과 인터폰을 구별할 줄 모르는 좀 무식한 재떨이(박상면) 다음의 넘버 3로 위치가 올라간다. 조직을 재건한 그들은 닥치는 대로 돈을 긁는다. 룸싸롱을 장악하고 부동산을 헐값에 사는데 준법정신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다.

가는 곳마다 조직을 폐허로 만드는 열혈검사 마동팔(최민식)이 이들을 째려본다. 그는 깡패보다도 입이 더 거칠다. 이른바 합법적인 깡패다. 불법 깡패 태규와 합법 깡패 동팔의 대결이 벌어진다.

태규와 동팔 혹은 조필과 재철의 운명이 매우 흥미롭다. 주인공은 태규이니 태규에게는 예쁜 애인(이미연)이 당연히 있다. 전직 술집 여자인 그녀는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감성이 넘치는데 술을 먹다 버지니아 울프가 찾아오면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창공을 날고 꿀을 찾아 헤매는 벌이 되기도 한다. 그에게 시인 스승이 나타나고 그들은 겁 없이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한다. 놀라운 감독의 변신술이 여기서 한 번 더 빛을 발한다. 우스꽝스러운 러브 신은 전혀 눈에 거스르지 않고 그저 웃음을 참느라고 눈물만 찔끔 흘릴 뿐이다. ( 감히 넘버 3의 여자를 건드린 시인 랭보의 운명도 관객들은 눈여겨봐야 한다.)

이 정도면 영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대충은 짐작이 갈 것이다. 여기에 양념처럼 폭력과 살인과 섹스와 사기와 협박과 공갈과 매수 같은 것이 등장하면 나올 것은 거지반 다 나왔다.

태규는 언제 다칠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용케도 견디고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는 그리던 일인자의 위치에 올라섰을까. 조직은 될 놈의 손에는 피를 묻히게 하지 않는다는 속설은 뒤집어질까.

 

태규의 총 3발을 맞고 파묻힌 자는 검사가 아니고 다른 자가 아닐까. 재떨이는 재떨이를 들고 일본 야쿠자의 입에서 독도는 일본땅이 아닌 한국땅이라는 말을 들었을까.

조폭 영화에 애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기 때문인데 태규는 그걸 무릎 쓰고 아이를 낳았을까.

조필은 라면 대신 쌀밥에 고깃국을 부하들에게 제대로 먹일까. 태규와 왕똘아이, 핵폭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동팔의 싸움에서 승자는?

깡패들은 나이를 실재보다 올려치는데 태규는 64년 용띠라고 사실대로 말한다. ( 찾아보니 태규역의 한석규는 64년 용띠가 맞다.) 21세기가 목전인데( 이 영화가 나온 1997년을 생각하자.) 깡패들은 여전히 깡패 영화 찍듯이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한다. ( 21세기인 지금도 그런지 궁금하다.)

지난 호에 소개한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 처럼 대사가 아주 통통 뛴다. 화면도 빠르고 허접한 장면이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욕설도 들을 만하고 싸움질도 그렇고 갑자기 시인이 다가와 건달 계의 알 카포네로 불려도 좋을 랭보와 같은 시어를 읊어도 이상하지 않다. (시인 랭보가 등장하는 장면은 배꼽 빠지게 웃기다. 이 장면만 보면 코믹영화라고 불러야 한다. 돈을 주고 시인을 산다. 저급 문화 세태의 반영이다. 지금도 그런다는 설이 있다. )

나를 사랑하느냐고 여자가 물으면 남자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아닌 대답의 해명이 좋다. 사랑은 90% 이상 믿는다는 건데 나는 그 만큼 못 믿는다고. 그럼 몇 %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차 물으면 51%라고 능청을 떤다. 난 어떤 새끼고 49% 이상 안 믿는다고.

깡패가 이런 멋진 말을 사용하면 대단하게 보이지 않겠나. 그런 남자에 그런 여자가 응수한다. 오빠, 다리 병신 되면 나 신발 바꿔 신는다고 너스레다. 이제는 2 인자가 됐다고 으스대자 그래봤자 깡패라고 흘겨본다. 그래도 기분이 좋으면 너, 오늘부터 술집 때려 쳐! 이런 호기스런 말이 튄다.

이런 시나리오라면 영화의 기본은 이미 된 거나 마찬가지다. 조필이도 막중한 임무를 수월하게 해낸다. 태규와 한 축인 조필의 활약은 태규와는 조금 결을 달리한다.

태규가 넘버 1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조필은 부하들을 교육시키기에 바쁘다. 세상 물정이며 돌아가는 경제 이야기로 앞으로 다가올 새 시대를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가 물 흐르듯 이야기 하거나 말문이 막혀 더듬 더듬 할 때도 감히 그 앞에서 대꾸하는 조직원은 없다. 조필 역시 태규만큼이나 악질이며 인정사정없기 때문이다.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코믹요소는 팽팽하게 긴장한 근육을 풀어준다. 랭보와 벌이는 질펀한 동침에 언제 칼잡이가 등장할지 조마조마하면서도 장면에 몰입하는 것은 나와도 그렇고 안 나와도 전혀 문제가 될 것 없는 짜진 각본이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아름답다거나 저렇게 되고 싶다는 느낌보다는 이런 유의 영화를 이렇게 잘 만들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된다. 이 영화 이후 나온 숱한 조폭 영화는 다 이 영화를 참고자료로 활용하지 않았나 싶을 만큼 선구적이다.

국가: 한국

감독: 송능한

출연: 한석규, 이미연

평점:

 

: 건달을 다른 말로 불한당이라고 한다.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조필이 하는 말이다. 부하들을 모아 놓고 그는 이런 훈시를 수시로 하는데 현정화와 임춘애를 착각했을 때 부하가 그것을 지적하면 그는 순간적으로 돈다.

그래서 마구 패고 또 팬다. 그는 곧 법이다. 하늘이 빨간색이라고 하면 그날부터 하늘은 파란색이 아니다. 그가 헝그리 정신을 말하면서 주먹을 뻗을 때면 전성기 때 홍수환의 새도우 복싱만큼 날렵하다. 될성부른 떡잎은 알아본다고 했던가.

송강호의 무표정한 연기와 더듬거리는 억양에 소름이 돋는다. 이이제이, 무주공산, 어부지리, 당랑지부 같은 사자성어가 화면을 채울 때면 포복절도가 따로 없다.

건달과 깡패를 비교하거나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다 좆 같은 말이라거나 우리가 왜 재벌이 못 되는 줄 아느냐, 다 세금 때문이다, 우리가 먹여 살리는 놈이 한두 놈이냐, 우리가 달아준 금배지가 한두 개냐 등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살아있는 언어다.

검사 자식이 돈 뜯기는 현실을 개탄하거나 뇌물, 비자금, 아버지 후광으로 사는 새끼들이 진짜 깡패라는 말도 그렇다. 어느 날 진짜 깡패가 세속의 깡패로 돌아와 차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언급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그리고 애를 가지자는 여자와 이 바닥 15년인데 넘버 1원 한번은 해보고 싶다는 남자의 티격태격은 그칠 줄 모른다. 영화가 끝나간다. 아쉬운 듯 송강호의 강의도 종을 친다.

전설적 인물 나, 최용희야 하면서 소와 싸우고 코쟁이와 맞짱 뜰 때도 나 최용희야 한 마디하고 마구 패는 무대포 정신에 수강생들은 넋을 잃는다.

송능한 감독은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

이런 명작으로 입봉 했을 때 <기생충>으로 칸에서 그랑프리를 거머쥔 봉준호 감독은 오래전에 송감독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봉감독의 디테일이 송감독의 촘촘함을 알아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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