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30 06:03 (화)
8. 장례식장 못간 불효자식 엎드려 울다
상태바
8. 장례식장 못간 불효자식 엎드려 울다
  • 의약뉴스
  • 승인 2008.12.24 0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25 전쟁터지자 단 하루만에
어머니 희망 따라 오신 외할아버지...
나는 외할아버지 지게 위 삼태기에 타고
누나는 걸어서 엄마 만나러 간다.

기차 타고 100리길.. 통통배 타고 천리길..
밤안개 사이로 바닷길 찾아
통통배 밤새워 파도를 헤치며
남쪽바다 향기로운 어머니 고향땅
생이별 어머니의 뜨거운 포옹
어머니 날마다 먼 길로 떠나네

동생만 들쳐 업고 나는 늘 떨어져
작심하고 어머니 치맛자락 매달리는데
어머니는 울부짖는 나를 뿌리치고
멀리 멀리 떠나 어디로 가셨을까?

울다 지쳐 쓰러져 잠든 나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
알아요! 어머니 미안해요 어머니
저 멀리 황량한 언덕길로 걸어가는 당신은
정녕 나의 어머니 인가요!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기말고사다, 리포트 제출이다, 눈코 뜰새 없이 일과에 쫓기다 보니 어느새 대학 첫 겨울 방학이 코앞에 닥쳐오고 있었다.

12월초 겨울 첫 추위가 강산을 엄습했던 어느 날..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어머니께서 돌아 가셨단다. 마지막 피를 흘리고 돌아 가셨단다.

누나는 이모부와 외삼촌이 납치 하다시피 데려 갔단다.

누나를 내주지 않으려는 아버지와 외삼촌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으며 외삼촌이 나의 아버지 얼굴을 때려 아버지의 이빨이 부러져 경찰서에 갔다가 아버지께서 백배 양보해서 누나만 데려 가기로 하고 고소를 취하 했다나, 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그런식으로 나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이모부께서는 누나의 뺨따귀를 때리면서 싸가지 없는X 라 욕하며 반 강제로 어머니 장례식에 데려 갔단다.

그날 나는 학교 실습이 늦게 끝나 집에 왔을 때는 거의 저녁 8시가 지나있었다.

어머니 주검이라도 찾아가 뵙고 싶었다. 그러나 심적 충격과 슬픔뿐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어머니에게 마지막 불효를 저질렀던가?

나는 어머니께서 내가 졸업할 때까지 살아 버텨 주기를 조바심치며 바랬으나 끝내 돌아가신 어머니가 차라리 원망스러웠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대학 입시 공부에 몰입 했었는데..

나의 꿈을 산산히 부셔 버리고 영원히 떠나신 어머니는 정말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끌려갔던 누나는 슬픔보다는 온갖 역겨운 굴욕을 당한듯 싶었다.

집에 돌아온 누나는 장례식에 대한 어떠한 자세한 이야기도 나에게 해주지 않았다. 하기야 어머니를 찾아 헤맸던 것은 누나가 아니고 바로 나였으므로...

누나의 입장으로서는 생모에 대한 애절함이 나보다 덜 했을것 이리라.

생각해 보면 누나가 무슨 죄가 있겠나! 어머니께서 우리 남매를 버리고 나가셨다면 재혼을 한다던지 아니면 어떻게 해서라도 떳떳하게 스스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면서 우리 남매에게는 불행한 생모가 있다는 부담을 끼쳐 주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었을까?

우리 남매는 그저 어른들이 설치한 덫에 걸려 암울한 어린 시절을 겪을 수 밖에 없었으며 어리기 때문에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도 능력도 없었다.

어머니는 스스로 행복하고 독립 하셨어야 했는데 정신적으로 의지 할 곳을 찾아 신앙촌에 들어갔다가 신앙촌 영업에 빚만 지고 그 곳에서도 쫓겨나는 처지가 되어 그 변두리 폐농가 오두막 집에 은신 하시다 끝내는 이모네집 동네에서 기거 하시다 마지막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3~4년만 생명줄을 놓지 않고 버텨만 주시었던들 나는 어머니를 구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궂이 약학대학을 택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아마도 음대에 갔을것이다. 나의 음악이 세계인에게 마음의 양식과 위로가 되어 더 나아가 그것이 온누리의 행복과 평화로 이어 진다면 더 없는 보람과 성과를 얻을 수 있었을텐데...

오직 일념 하나 어머니를 구하여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나는 음대에 갈 수 없었던것이었다. 지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는 진정한 어머니의 정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왜 어릴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집착을 그리도 심하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만 3세에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고 2년 후 6.25 전쟁부터 9.28 수복까지 몇 개월만 어머니 곁에 있어 봤지 그 이후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나의 비극의 씨앗이 되었던 아버지의 첩은 어느 날 서울 시집살이가 부담이 되었는지 무슨 이유인지, 도망쳐서는 어느 고위 공직자와 살림을 차렸다나...하는 뜬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또 다시 처녀 장가를 가서 나는 처녀 시집 온 새엄마 밑에서 살게 되었다.

새엄마는 마음씨가 착한 여자였다. 혼기를 놓쳐 재취 해 들어온 여자인지라 그녀의 꿈은 전실 자식들을 빨리 키워 시집, 장가 보내고 자신은 자신의 친자식과 남편과 함께 알콩달콩 살아보는 것이 꿈이란다.

새어머니의 나름대로 헌신적인 살림 살이에 우리 모든 가족은 표면상으로는 평온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피를 토하고 떠나신 어머니 죄송해요. 도와 구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때 제 입장은 어쩔수 없었어요.

어머니 또한 얼마나 가슴 아팠겠습니까? 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못 하셨다고 큰 아들에게 내 아들 이리 온 하며 당당하게 두 팔 벌려 안아 줄 수 없었던 어머니의 위축된 안타까운 어려운 심정 저는 이해하고도 남아요.

그저 저를 낳아 준 은혜는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저를 낳아준 어머니께서 살아 기다려 주셨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 도 없었고 제가 어머니 모시고 어머니의 여생을 함께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머니 좋아 하시는 음식도 같이 즐기고 어머니 친정 고향 덕산에 가 따뜻한 온천탕에 지친 심신도 풀고 싱싱한 과수원 사과도 따 먹어 보고... 어머니 왜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 몇 년을 못 버티시고 전 자신 있었는데...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나는 조치원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어머니를 잃은 쓰라린 마음 달랠 길 없어 조금이라도 어느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었다.

지난 2년간 나와 편지를 나눴던 펜팔 여자 친구 순이를 찾아보고 싶었다.

내 마음에 그녀를 만나면 그동안 쌓였던 나의 시름이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위로를 받고 싶었다. 박순이 그녀 여고 3학년 초에 나는 그녀의 첫 편지를 받았었다. 나 역시 그 때는 대학 입시 준비 중에 있었다.

학교 친구가 우연히 나에게 주소를 주면서 여자 펜팔 친구와 사귀는것이 도움이 된다며 소개를 시켜 주기에 간단한 나의 소개와 함께 뚜나바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섞어 편지를 띄웠더니 답장이 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저승사자 2008-12-30 09:07:31
장레식장에도 못갔다면 이는 틀림없이 불효자인데 왜 울지 않지요....
생모에 대한 정이 없었나 봅니다. 생모도 정이 없으면 생모라는 느낌이 안들지요. 이는 인지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