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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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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향수

▲ 그르누이는 향수의 13번째 비밀은 미녀의 육체임을 깨닫게
된다.
지난 1991년 국내에 처음 번역되어 많은 독자층을 거느렸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베스트셀러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마침내 동명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이 영화는 톰 튀크베어(Tom Tykwer)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는데, 튀크베어 감독의 이름이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1999년에 만든 <롤라 런>이라는 영화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부터였다. 롤라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이 20분 안에 거액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한다는 설정을 여러 각도에서 포착함으로써, 영화적 시간과 현실적 시간의 일치감을 극적으로 묘사한 일종의 실험적 영화였다. 그는 최근에는 세계적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감독 및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옴니버스 형식으로 만든 <사랑해, 파리>라는 작품의 한 파트를 연출하기도 했다. 튀크베어 감독이 2년 여의 시간을 들여 각고 끝에 만든 <향수>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그는 과연 원작의 향기를 얼마만큼이나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가?

쥐스킨트는 소설의 첫 머리에서 18세기 프랑스에는 천재적인 인물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한 천재의 이야기를 다루겠노라고 밝히고 있다. 당대의 천재들은 그 분야가 무엇이든 간에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무언가를 남겼지만, 이 천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케이스라 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천재성을 발휘했던 영역은 바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냄새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혐오스러운 이유는? 그 천재의 태생적 한계 속에 그 해답이 들어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썩은 생선더미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 그가 살았던 18세기는 어딜 가나 악취에 찌들어있었는데, 그중 가장 심한 곳이 유럽 최대 도시인 파리였고, 그중에서도 생선시장은 최악이었다. 코를 찌르는 이 악취를 뚫고 1738년 7월17일 그가 세상에 태어났다. 

   
▲ 영화 속 인물은 향기에 매혹돼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결국 자신을 유기(遺棄)하려했던 비정한 엄마는 영아살해 죄로 참수당하고 천애 고아가 된 그는 여러 보모들의 손에 키워지면서 강인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핏덩이의 형상을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냄새로 인식하는 특이한 역량(力量)을 키워가게 된다. 게다가 천부적인 후각(嗅覺)의 소유자인 그 아이에게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참기 힘든 악취 속에서 방기된 것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무색무취한 신체 탓에 악마의 자식으로까지 내몰렸던 그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고된 하루하루를 영위해 간다. 어느 덧 10대 소년이 된 그르누이는 난생 처음 파리를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다. 현란한 축포가 터지는 세느강가에서 그르누이는 지금껏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여인의 향기’에 도취된 자신을 발견한다. 여인의 향기란 도대체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는 살구를 파는 젊은 아가씨의 향기에 매혹된 그르누이가 그녀를 추적하여 살해하는 장면이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나의 어설픈 필설(筆舌)로는 도저히 향기의 실체를 전달할 수 없으므로 차라리 원작의 그 대목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제 그는 그녀에게서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겨드랑이에서는 땀내가, 머리카락에서는 기름 냄새가, 그리고 국부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퍼져 나왔다. 최고의 희열감이 찾아왔다. 그녀의 땀은 바다 바람처럼 상쾌했고, 머리카락의 기름기는 호두 기름 같았으며, 국부는 수련 꽃다발의 향기를, 그리고 피부는 살구꽃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성분들이 결합되어 향수처럼 향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풍부하고 균형이 잡힌 신비로운 향기였기 때문에 그르누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맡아 본 모든 향수와 그 자신이 상상 속에서 장난삼아 만들어 본 향기의 건축물들이 한순간에 아무 의미도 없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십만 가지의 향기를 갖다 댄다고 해도 이 향기 하나를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향수』, 열린책들, 67쪽).

그르누이는 여인의 향기(즉 체취)에 취해 급기야 살인까지 저질렀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 향기를 보존할 방법을 찾지 못해 안달할 따름이었다. 애당초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그는 의도적으로 향수 제조인에게 접근하여 향수 제조 방법을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영화에서는 더스틴 호프만이 한 때 잘나갔다가 이제는 퇴물이 된 향수제조인인 주세페 발디니 역을 맡아 호연을 하고 있다. 그르누이는 발디니가 아무리 애써도 풀지 못한 당대 최고 인기상품인 <사랑과 영혼>이라는 향수를 능가하는 <나폴리의 밤>이라는 신제품을 만들어줌으로써 자신의 야심을 키울 발판을 마련한다. 그러던 중 그르누이는 발디니로부터 향수제조공법에 관한 결정적인 힌트를 듣게 된다. 향수를 만드는 12가지 기본 재료 외에 13번째의 재료가 있는데, 그 실체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얘기였다. 

어쨌든 파리를 평정한 우리의 주인공 그르누이는 ‘향수의 본고장’이라는 그라스(프랑스 남동부 지역)에 진출하여 보다 전문적으로 향수를 만드는 법을 습득해 나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13번째 재료의 비밀을 풀기시작 했던 것. 그 재료가 다름 아닌 미녀(美女)의 육체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사실 내가 리뷰에 담을 수 있는 스토리 요약은 여기까지다. 이미 원작소설을 읽은 수십만 독자들에게는 불필요한 얘기가 될 터이고, 아직 소설은 물론이고 영화도 접하지 못한 관객들에게 공연스레 결말까지 누설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 그르누이는 향수의 13번째 비밀은 미녀의 육체임을 깨닫게
된다.
원작과 각색과의 관계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하겠다. 흔히 어떤 문학작품이 영화화되면, 원작에 충실했느냐 혹은 원작을 넘어섰느냐 하는 질문이 대두되곤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장편 원작소설을 넘어선 영화작품은 없다.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선무엇보다도 오리지널과 각색(脚色)이라는 발생론적 우선순위가 천형(天刑)처럼 따라다닌다는 점이다. 게다가 각색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원작 소설에서 발디니가 무대포로 들이대는 그르누이에게 테스트의 기회를 주는 대목은 영화 속 그것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데, 향수제조업을 접을 수밖에 없는 그의 내적 고민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맥락이 영화에서는 거두절미되어 있다. 그리하여 톰 튀크베어 감독의 각색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원작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누군가 비판한다면, 그는 결국 하나마나한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애당초 각색을 해서는 안 되었다고 주장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원작에 충실했느냐의 여부도 원작자와의 판권 시비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 개별 작품을 비교하고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매체가 다른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런데 원작소설과 각색영화가 공통적으로 수행해내지 못한 것이 딱 하나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향기의 포착이다. 한번 발산하면 곧 흩어져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향기를 그 어느 매체가 포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 향기를 포착하려했던 그르누이의 천재적 발상이 더욱 아이러니컬하게 다가온다. 한때 향기 나는 영화를 실험한 적이 있었다. 스크린에  꽃다발을 주는 장면이 나오면 객석 한편에서 꽃향기를 내보내는 유치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밀폐된 극장 안에 누적된 꽃향기는 팝콘의 기름 냄새와 섞이면서 악취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활자로도 이미지로도 포박되지 않는 향수의 실체란 참으로 오묘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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