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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나 너로 이어지는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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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나 너로 이어지는 악연
  • 의약뉴스
  • 승인 2007.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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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바벨

▲ <바벨>은 기후상의 ‘나비효과’를 다국적 시대 인간군상이 겪는 악연에 적용한 케이스이다.
이미 상투적인 지적이 된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최근 일련의 서구 영화에 나타난 타자의 재현은 그 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 시에라리온(Sierra Leone)의 정부군과 반군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정도를 넘어 피에 굶주린 살인마들로 묘사된다. 불법으로 채취한 이른바 ‘피의 다이아몬드’로 부를 챙기는 서방 세계의 악덕 업자들을 고발한다는 대외명분이 있긴 하지만, 그 이면에 깔려 있는 부족민들의 야만성에 대한 의도적 폭로는 가히 폭력적이라 할만하다. 말하자면 서방세계의 부도덕한 상행위가 문명이 지닌 옥(玉)의 티 정도라면, 타자들의 야만적 행위는 타고난 악 그 자체라고 할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오스카 주연상 깜이긴 하지만 말이다.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마야 민족의 원시성을 지극히 생동감 넘치는 영상으로 묘사했다하여 화제를 모은 멜 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 Apocalyto>는 그 야만성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 이를테면 한 부족이 사로잡은 포로들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은 차마 목불인견이다. 포로(즉 노예)를 제단에 바로 뉘어놓은 상태에서 칼로 심장을 후벼낸 후 목을 쳐서 날려 버린다. 이런 장면이 대여섯 차례 반복되는데, 보는 이의 심사가 뒤틀릴 지경이다.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다름 아닌 콜럼부스가 그 야만(?)의 땅에 상륙함으로써 비로소 이웃 부족들 간의 피 튀기는 살육전이 종식되었다고 감독은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백인들이 노예를 다루는 방식은 적어도 그보다는 신사적이었다는 얘기다. 아니, 아예 콜럼부스 자신을 노예 해방자로 보고 싶은 것이 깁슨의 속내 아닐까? 아! 멜 깁슨. 이 백인 친구야말로 연구대상이다. 메가폰을 잡은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패트리어트>는 그 단적인 예다.

내친 김에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최근 그 현란한 액션과 강렬한 비주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300>이란 영화를 보자. 페르시아의 백만 대군(?)에 맞서 싸웠던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戰士)들의 신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일단 스펙터클의 측면에서는 비슷한 소재의 <글라디에이터>를 능가하지만, 타자들의 재현 방식에 있어서는 이만한 퇴행도 없을 듯싶다. 스파르타를 유린하려는 침략자 페르시아의 용사들은 그 용맹함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기형적인 야수(野獸) 내지는 괴물 형상으로 묘사된다. 이는 물론 어렸을 때부터 우량아만을 선별하여 양육하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잘 생긴 용모에다 강인한 체력의 정상적인 서구인들이 탐욕에 찌든 기형적인 동양인들에 맞서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다는 것이 <300>의 핵심 얼개인 셈이다. 아무생각 없이 보면 그냥 재미있는 한 편의 액션영화에 불과한 듯 보이지만, 극장 문을 나설라치면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인 일일까? 게다가 페르시아란 이란의 옛 왕국이 아니던가?

   
▲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이에 쳐진 벽이 결국 어린 아이들을 사지로 내몬다.
발터 벤야민은 나치정권의 만행(蠻行)을 목도하면서 “문명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설파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서구가 오늘날 그토록 찬란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서구가 행한 야만적 폭력과 착취 덕분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터이다. 분명 그런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상당수 서구 지식인들은 문명과 야만을 이분법적 범주로 구분하고 전자를 서구에, 그리고 후자를 비(非)서구(동양, 아프리카, 제삼세계)에 귀속시키는 의도적인 우를 범하고 있다.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살펴본 위 3편의 영화는 그런 기존의 통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셈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우리는 멕시코 출신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바벨 Babel>이라는 매우 특이한 영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야말로 벤야민의 테제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용은 좀 복잡하다.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결국 하나의 사건으로 수렴되는 아주 정밀한 내러티브로 짜여있기 때문이다. 먼저 모로코다. 외관상 문명의 이기(利器)를 전혀 누리지 못하고 사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모로코의 한 외진 곳이 무대다. 양치기를 하면서 단란하게 살고 있는 한 가정에 어느 날 고급 사냥총 한 자루가 생긴다. 양치기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그 집 가장이 무리를 해서 이웃사람에게 구입을 한 것이다. 그는 어린 두 아들에게 사냥총을 건네주면서 사격연습을 시킨다.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자칼로부터 양들을 지키기 위해선 최선의 무기라는 자부심과 함께 말이다. 철부지 아이들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실전에 응용할 요량으로 구체적 목표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대기 시작한다. 때맞추어 굽이굽이 고갯길로 접어드는 관광버스 한 대가 두 아이의 표적이 된다. 이어지는 총성과 급정거하는 버스. 승객 중 한명이 총에 맞은 것이다.

다음은 시간이 약간 소급된 장면이다. 아이를 잃고 실의에 빠진 아내 수잔(케이트 블란쳇)을 위해 모로코로 여행을 떠나자고 제의했던 남편 리처드(브레드 피트)는 여전히 심드렁한 아내한테 무지 미안한 표정이다. 냉장도 안 된 뜨거운 캔 콜라를 마실 수밖에 없는 오지(奧地)인 모로코가 여전히 낯선 탓이다. 그래도 여행은 여행인지라, 불편을 감수하고 나란히 버스 중간에 자리를 잡은 부부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일이 벌어졌다. 버스 천정을 뚫고 들어온 총알이 수잔의 목과 어깨 사이를 관통한 것. 병원이 있는 시내까지는 수 시간이 걸리는 시골길이라 버스는 일단 인근 마을에 들러 응급처치를 해야 했다. 비상사태가 터진 것이다. 동승한 승객들은 하나같이 테러 사건이라고 규정을 했고, 이어 모로코 경찰 당국이 수사에 나선다.

한편, 장소는 바뀌어 미국이다. 리처드 부부의 집이다. 부부가 여행 중이라 어린 아들과 그보다 더 어린 딸을 멕시코 계 유모가 돌보고 있는 중이다. 두 아이를 자신의 수족처럼 아껴주는 이 유모에게 그러나 한 가지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아들의 결혼식에 가야 하지만, 두 아이를 대신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다. 시간은 다가오고 할 수 없이 두 아이를 데리고 멕시코 국경을 넘기로 작정한다. 결혼식은 성대하고 즐겁게 치렀지만 귀가 길에 사고가 발생한다. 멕시코인들이 백인 아이 두 명과 함께 동승한 것 자체가 미 국경수비대의 눈에 의심스런 행위로 비춰진 것. 결국 유모는 본의 아니게 두 아이를 인적 없는 사막에 방치하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낯선 땅에서 총 맞은 엄마와 역시 낯선 땅에서 길을 잃어버린 두 남매의 운명은?

   
▲ <바벨>은 기후상의 ‘나비효과’를 다국적 시대 인간군상이 겪는 악연에 적용한 케이스이다.
그런데 다시 무대가 바뀐다. 이번에는 일본 땅이다. 모로코와 멕시코를 번갈아 구경하던 나는 느닷없는 일본 장면에 처음에는 솔직히 좀 당혹스러웠다. 필름이 바뀐 것이 아닌가하고도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참고로 나는 보통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작품을 감상한다. 그래야 작품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본의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가 등장하니 좀 참고 지켜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의 사업가로 분한 코지는 극중 사건의 한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이었음이 밝혀진다. 사냥을 좋아했던 그는 수차에 걸쳐 모로코로 사냥 여행을 간적이 있었고, 어느 날 가이드한테 사냥총을 선물로 주고는 사냥을 뚝 끊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모로코 현지인한테 선물로 준 사냥총이 결국 미국인 관광객을 쏘게 되는 치명적 무기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치에코라는 여고생 딸이 있는데, 그녀는 청각장애인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가족사의 비밀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드러나게 된다. 더군다나 청각장애인에 대한 왕따는 문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쯤해서 내용파악은 접기로 하자. 영화를 보면 다 알 수 있으니까. 미국과 멕시코 그리고 일본에서 다시 모로코로 카메라는 바쁘게 공간이동하면서 총격사건의 의미를 파헤쳐 나간다. 애당초 총격사건은 미국관광객을 겨냥한 아랍 테러집단의 소행으로 여겨졌고, 국제 언론도 그 방향으로 집중적으로 보도를 하면서 테러를 성토하는데 열을 올렸다. 총격사건을 직접 목격한 현장의 관광객들의 태도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당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 테러소굴(?)로부터 벗어날 요량으로 사경을 헤매는 중환자와 남편을 현지에 내팽개치고 타고 온 버스를 탈취하다시피 하여 현장을 벗어나는 추태를 보인다.

나는 벤야민의 테제를 이 영화를 이해하는 화두로 삼았다. 본래 이 작품은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영화다. <바벨>이라는 제목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감독 자신도 연출의 변을 통해 그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타자를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선이다. 타자의 재현이 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미국 관광객에 대한 총격이 아랍인의 의도된 테러가 아니라 철부지들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우발적 사건이었음을 알고 있다. 게다가 그 사건에 사용된 총기는 다름 아닌 서방 선진국(일본)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다. 말하자면 기후상의 ‘나비효과’를 다국적 시대 인간군상이 겪는 악연에 적용한 케이스라 하겠다.

어떤 학자는 서구 문명의 세 가지 축으로 총(銃)과 균(菌) 그리고 쇠(鐵)를 들기도 했다. 콜럼부스와 함께 균이 신대륙에 유입됨으로써 현지주민 절반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침략자 백인의 야만적 포획에 저항하다 총에 맞아 죽어나갔다. 그들이 가진 소박한 돌칼과 돌창은 철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영화 <바벨>은 문명과 야만이라는 단순무식한 이분법을 해체하고 문명과 야만은 결국 동전의 양면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문명과 야만 사이에 여전히 견고한 벽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이에 쳐진 벽이 결국 어린 아이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것 아닌가? 그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멕시코 출신 감독은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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