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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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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일정
  • 의약뉴스
  • 승인 2016.01.2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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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

세상에 태어나서 의자를 이렇게 세밀하게 관찰해 본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아마도가 아니라 ‘확실히’가 맞다. 고작 의자 하나뿐인데 뭘 볼 게 있다고 돌았는지 내가 돈 것은 아닌지 잠지 착각에 빠졌다.

의자의 받침대와 받침대를 연결하는 나사못 그리고 불로 구부린 허리를 받치는 부분을 유심히 봤다. 그런다고 해서 의자가 쇼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거장이 앉았던 의자라면 이 정도 격식을 차려야 의자 주인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의자에 절을 하지 않은 것만도 해도 나는 자존심을 지켰다.

나무는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하고 원래 색깔에서 조금 더 어둡게 바래 있었다. 좀 더 검은 색 쪽으로 색깔이 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손 때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어느 깊은 숲속에서, 나는지도 모르게 나서 자라는지도 모르게 자라고 어느 순간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 의해 거칠게 잘라져서 노끈에 묶여서 어느 목수의 마당에 뺑개쳐졌다.  발길질에 차이던 나는 어느 날 무료하던 목수의 대패질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의자의 다리가 됐다.

의자가 말하는 듯 했다. 엉덩이를 걸치는 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시골 마을 볕드는 곳에 주름 진 노파가 실을 뽑고 염색을 하고 시장에 내달 팔았는데 운 좋게도 마침 술취해 그곳을 지나가던 목수의 손에 걸려들었다. 나무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려던 목수는 대무 대신 천을 썼고 일을 쉽게 끝냈다.

친구 몇이서 술을 먹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무도 그렇고 천도 그렇고 참으로 운이 좋았다.

불쏘시개로 들어가 아궁이 속에서 타버리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가. 죄수의 숨통을 죄는 교수대 밧줄이 아닌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까짓 방귀 냄새를 좀 맡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을 때 까지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절규하는 죄인의 목줄을 걸고 있지 않은 것은 천을 짠 할머니가 적어도 3대에 걸쳐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의자의 기둥을 만져 보려고 했다. 하지만 영악한 관리들은 긴 팔 원숭이가 뻗어도 닫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 의자를 밀어 두었다.

위로 손을 올려도 마찬가지 였다. 겨우 의자인 주제에 만질 수도 없다는 것이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유물이 될 의자이니 그럴 만도 하다고 쉽게 포기했다.

나는 의자에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서둘러 화살표를 따라 가야 했다. 다행히 인파들은 다른 곳으로 갔는지 벽에 붙어 있는 그림앞에는 방해꾼이 없었다. 의자에 시간을 뺏긴 나는 정작 그림에는 짧은 눈길 한 번 주고는 서둘러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내가 서두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같이 간 일행들이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행들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나만 기다리면서 목을 빼고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같이 감상할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한 것도 속상한데 바쁜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들도 나처럼 서둘렀다. 그리고 내가 참여하지 못할 일정을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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