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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작업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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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작업도구
  • 의약뉴스
  • 승인 2016.01.1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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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은 북적였다. 사람들은 자기 눈높이에 맞게 걸린 그림과 사진을 보고 있었다.

화살표를 따라 한 쪽으로 움직이면서 스쳐 지나기도 했고 어떤 그림앞에서는 뒤의 사람은 아랑곳 않고 오랫동안 서서 지켜 보기도 했다.

마치 그림을 알고 있는 듯이 말이다. 작가의 의도는 물론 그림의 수준까지도 점수 매길 수 있다는 듯이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나는 쉽게 지나가는 다른이보다 더 유심히 보거나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서 있는거라고, 걸어가는 것이 힘들어 잠시 쉬는데 마침 그 때 앞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입을 약간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기도 하고 옆에 동료라도 있으면 손가락질을 하면서 뭐라고 설명하려는 특징이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비켜 지나갔다.

못마땅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으면 적당히 보고 양보해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도대체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는 것같았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는 식이다.

보지 못한 그림을 애써 외면하고 나는 화살표 방향을 찾았다. 한 바퀴 돌고 다시 오려던 심산이었는데 그만 코너 모서리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다행히 중심을 잡았지만 식은땀이 났다.

발을 걸었던 것은 앞서 가던 사람의 발이 아닌 의자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의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간이 구조물이었다. 나는 그 제서야 의자를 보았다.

의자가 거기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에 넘어질 뻔 한 것은 짜증날 일이 아니라 기분 좋은 일이었다. 돌부리에 걸려 코피가 났는데  화를 내려다보니 돈이 떨어져 있어 횡재한 것 같다고나 할까.

그 의자는 예사 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앉아 볼 수 있는 그런 의자가 아니었다. 그 의자는 고급 가죽으로 만든 세련된 디자인도 아니었고 오래된 나무로 만든 빈티지 제품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그림 이상으로 그 의자를 유심히 살폈다.

의자는 그림과 달리 사방에서 관찰 할 수 있었는데 심지어 나는 의자를 만져 보기 까지 했다. 누구 하나, 심지어 안내인조차도 제지하기 않아 나는 앉아 보려는 생각까지 했다.

그 의자는 스탠리 큐브릭이 앉던 의자였다. 지구상에 수 억개의 의자가 있지만 유명 영화감독의 의자는 몇 개 되지 않을 터이다. 그 의자를 지금 나는 만지고 있다.

의자에 앉아 감독은 지친 몸을 의지했을 것이다. 어떤 때는 몸을 크게 뒤척이거나 큐 사인을 내면서 터져 나오는 방귀 소리를 지우는데 쓰기도 했을 것이다.

배우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도록 내버려두는 의자의 모습이 예사로 울리 없었다.

이 의자에서 숱한 명작이 쏟아져 나왔다고 생각하니 물건은 살아서 움직였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어느 깊은 숲속에서 온 나무였다. 심지어 마법사의 돌에 나오는 움직이는 나무의 몸통으로 만들어 졌다는 상상까지 했다.

누군가에게 의자는 피곤한 사람은 어서 와서 쉬라는 의자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 의자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만드는 작업도구로 쓰이고 있었다.

나무 대신 헝겊으로 가로 질러진 의자에는 스탠리큐브릭 감독이 앉았던 의자라는 설명이 지우면 지워질 것 같이 희미한 연필체로 씌어져 있었다.

영화감독은 아니더라도 영화를 주의 깊게 보고 그래서 어떤 영화가 다른 영화보다 의미가 있는지 알고는 있었기에 의자를 만지는 손은 조금 설레었다.

나무 사이의 천은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안으로 쑥 들어가 있었는데 들어간 천들은 올이 풀어진 것도 있었다. 감독이 소탈하기까지 했나. 남들이 알 수 없을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아까 그 사람이 오랫동안 그림 앞에서 머문 것이 용서가 됐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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