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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작가의 남자의 세계 '백중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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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작가의 남자의 세계 '백중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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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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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옥의 또다른 작품 '일주일'도 함께
▲ 연극 백중사 이야기의 한 장면.

‘인류최초의 키스’(2001), ‘웃어라, 무덤아’(2004)의 작가 고연옥의 작품 두 편이 대학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배우세상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일주일’(오픈런, 박근형 연출)과 그 옆 대학로 우리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는 ‘백중사 이야기’(7월 23일까지. 문삼화 연출)다.

오픈런은 흥행성적을 보면서 폐막일을 정하는 방식이다.

30대 여성 작가로 우리가 그다지 자주 접하지는 못하는 이 작가의 작품 두 편을 함께 만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느껴진다. 그의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남성들이다.

‘일주일’은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형사들과 네 명의 마을 청년들의 투쟁 과정이고 ‘백중사 이야기’는 말 그대로 산골 마을 군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일주일’과 ‘백중사 이야기’는 요즘 연극에서 보기 힘든 선 굵은 서사를 간직하고 있다. 강렬한 사실성, 치열한 갈등, 치명적 사건들이 배우들의 에너지와 합쳐져 연극의 스케일을 키운다.

고작 4×6미터 정도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일주일’, 그보다 별로 크지 않은 사각형 무대에서 벌어지는 ‘백중사 이야기’의 사건들이 작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서사 속에서 개인은 존재(정체성)를 확인하기 위해 안간힘 쓰지만 고립된 공간과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들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한다.

작가는 주인공들, 사회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되는 하찮은 인물들인 이 주인공들이 처해있는 바로 그 존재 조건으로서 공간의 법칙과 시간의 냉혹함을 그려낸다. 가장 사실적인 상황 밑바닥에 시간과 공간, 인생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일주일’에서 살인사건의 범인을 쉽게 검거하려는 형사들의 수사망에 포착되는 네 명의 무직 청년들은 유치장에 갇힌 상태에서, 자유로웠던 자신들의 과거가 역설적으로 무가치했고 그 때문에 이곳에 갇혔음을 발견한다.

밀폐된 공간에 갇힌 청년들은 그들을 가둔 형사들의 의지 밖으로 탈출하지 못한다. 죄 없이도 노숙자라는 이유로, 노동운동 했다는 이유로, 사회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있는 이 나라에서 이 희곡은 단지 부조리 하지만은 않다.

짙은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경찰서에 청년들이 호명되어 들어오면 그들의 신발은 유치장 신발장에 처박히고 그들은 맨발로 서게 되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밀려오는 운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이들에게 외부적 규정력은 절대적이다. 이들은 저항하지 못하되 꿈만 키워내는 인물들이다.

젊은 배우들의 에너지는 가히 폭발적이다. 사회에 적대적인 고아 청년 길수(홍성인)가 객석으로 뿜어내는 적의 어린 눈빛으로부터 덕배(김진용), 영배(이호웅) 형제의 순수한 모습, 때탄 짧은 노란 ‘추리닝’ 바지를 돌려 입은 바보 삼식이(이민웅)의 백치성에 이르기까지.

‘백중사 이야기’에서 백중사(이국호, 조영규 더블)는 비천한 자기 존재를 구하는 유일한 희망을 ‘군대에 말뚝박는’ 것에서 찾는다. 대대장의 ‘말씀’만이 자신을 돌보아줄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그의 명령에 전 존재를 건다.

‘나 같은 놈’은 세상에서 아무도 봐주지 않지만 그런 내가 군대에서 맡게 되는 직분은 나를 ‘중요한’ 인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는 부대 사병들에게 자신의 사생활에 관련된 명령까지 내리게 되고 그로 인해 부대 사병들은 고통받는다. 작가는 어떤 감상성도 갖지 않은 채 언제나 현재적 시점에서 백중사와 사병들을 들여다본다.

‘백중사 이야기’ 역시 시간과 함께 파열되어 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백중사뿐 아니라 2년 반 혹은 3년의 저당 잡힌 생활을 하고 있는 사병들은 시간이 자기 몸 위에서 적대적으로 흘러감을 느낀다. 이 적대적 시간 속에 정상인이란 있을 수 없고 모두가 추락하는 것이다.

고립된 공간 속에서 시간은 어떻게 평범한 인간을 마모시키는가. 서로를 마모시키는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추락해 가는가. 고연옥의 두 연극은 시간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사람들 간의 투쟁이며 결국은 그 속에서 존재의 존엄성을 무너뜨리고 마는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격렬한 현실적 갈등 속에 형이상학적 질문 던지기, 이것이 작가가 가진 미덕이다. 그러나 분명 아쉬운 점도 있다. ‘일주일’의 청년들이 결국 왜 무너지는지, ‘백중사 이야기’의 치명적 진실은 무엇인지 내게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측면들이 있다. 내게는 그들의 서사가 아직도 미완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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