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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약사통신 정진호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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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약사통신 정진호 약사
  • 의약뉴스
  • 승인 2002.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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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분쟁 '삭발주역'에서 대표이사까지
'세월'은 강산도 사람도 변하게 한다. 정진호 약사를 꼭 7년만에 다시 만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외모에서 만큼은 그랬다.

작은키 다부진 몸 부리부리한 눈매는 10여년의 세월도 그를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사고는 많이 변해 있었다. 그는 "이제는 장삿꾼이 다 됐다"고 말했다.

정진호 약사는 95년 한약분쟁으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 할 때 그 한목판에 있었다. 그는 '삭발단식'의 주인공으로 활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던 약사회와 약사사회를 단결 시켰던 일등공신이었다.

그때를 회상하자 그는 예의 소년같은 아주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약사회 4층 강당에서 11일간 삭발단식했던 과거로 돌아갔다. 당시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전의에 불타던 이글거리던 눈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온화한 40 중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86년 약대를 졸업한 그는 7,8년간 인천과 부천을 떠돌면서 약국을 했던 평범한 약사였다. 골목에서 한달 벌어 한달 먹고살던 시절이었으나 환자와 직접 상대했던 새내기 약사에게는 귀중한 순간이었다.

약국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 대형약국 난매문제가 약사사회를 요동치게 만들기 시작했다. 약사회를 중심으로 소형약국들은 대형약국들이 난매, 이른바 '약을 싸게 판다'고 아우성이었다.

당시 인천지역에는 동서대약국이 분점을 개설한다는 소문으로 흉흉했고 그는 인천 대형약국저지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것이 그가 약사회와 인연을 맺게 된 첫번째 계기였다.

당시는 표준소매가 제도가 있어 이 보다 현저하게 약을 싸게 팔 경우 보통의 다른 약사들로 부터 '상종못할 인간'이라고, '약사의 질을 떨어뜨리는 원흉'으로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약약 갈등의 시대였다.

"지금생각하면 잘못 된것이죠. 하지만 그때는 그랬어요. 싸게 파는 약사는 약사도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는 허허실실 웃었다. 투쟁위원회에서 그는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물론 약국도 열심히 봤다. 그런덕에 8년만에 내집 장만도 할 수 있었다.

93년 2월 한약분쟁이 터졌다. 약사법에 있는 '재래식 한약장 설치 조항' 삭제를 이유로 한의사들이 대규모 광고전을 시작하면서 약사들을 공격했다. 이 조항의 삭제는 '누구나 한약을 지을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한의사들은 결사적으로 정부와 약사를 비난했다.

이듬해 4월 이 조항은 삭제됐다. 대신 약사들은 100방 한도내에서 한약을 조제 할 수 있게 됐고 한약사제도(한의사가 처방하면 한약사가 조제하는 것.)도 생겨났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100방내에서 가감을 금지하느냐 허용하느냐로 또다시 한의사와의 마찰이 일었다. 95년 3월이었다. 그는 인천의 김성만 이상성 약사와 함께 삭발단식을 결의했다.

그리고 이상성 약사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약사회 4층 강당에서 11일간의 단식(김성만 약사는 인천시약에서 했다.) 에 들어갔다. (정약사의 단식경험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군대 가기싫어 며칠간 단식해 살을 뻿고 그 결과 방위병으로 제대했다. 그는 이런 부끄러운 과거도 웃으면서 말했다.)

'가감금지철폐'와 당시 '서상목 복지부장관 퇴진'이 단식 슬로건 이었다. 단식소식은 전국의 약사들에게 순식간에 전파됐다. 단식장에는 약사회 임원들과 전국에서 올라온 회원들의 격려가 줄을 이었다.

말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약사들이 있었고 미안하다고 용서를 비는 회원들이 부지기 수였다.( 우는 약사 가운데 여약사는 한명도 없었고 전부 남약사 였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갈피를 잡지 못했던 정종엽 집행부는 이를 계기로 활기를 되찾고 약사들은 할 수 있다는 투쟁열기가 용광로 처럼 들끊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에 정약사는 용기백배 단식일수를 늘려갔다.

"하나도 배고프지 않았어요. 낮에는 전국에서 격려차 올라온 회원들과 토론하고 밤에는 쓰러져 잤지요. 그렇게 11일 째 되던날 단식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 가감금지 철폐나 장관퇴진은 사실상 어렵고 약사회를 단결시켰으니 이정도면 됐다고 판단했다.) 했다는 약사회 지도부의 의견을 따랐다.

단식을 끝내고 인천시약 임원들이 사준 냉면을 곧장 한그릇 비웠다. "굉장히 맛있었어요. 병원검진결과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식사를 바로 했는제 아무런 이상은 없었어요."

그후 그는 단식전 판 약국을 처분하고 바로 약사회 상근약사로 취직했다. 약사회 지하에서 근무했는데 그가 한 일은 정책위원회 산하 약사옴부즈맨 일이었다. 약사들의 의견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일이었는데 3달만에 그만뒀다.

150만원의 월급으로는 약사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인천의 한 선배가 운영하는 대형약국의 관리약사로 취직해 한달에 30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

몇년전에 사시로 봤던 대형약국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도 했지만 약사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기본 마인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형약국에서 한 3년 일하다 98년 3월 한약분쟁 주역들이 만든 대한약사통신 전무로 입사했다. (당시 사장은 김병진 약사로 현재 팜스넷 대표로 있다.) 그리고 2000년 7월 대표로 취임해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말했다. " 삭발단식 투쟁 때가 인기절정 이었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그는 이제 그가 말했던 것처럼 장사꾼이돼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삶을 완성해 나가고 있다. 돌이켜 보면 파란만장 한 그의 모습이 앞으로는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해 진다.

이병구 기자(bgu5k@news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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