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수는 양쪽을 부지런히 오갔다. 민족진영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의 위험성을 사회주의 쪽에는 민족진영이 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사람이라도 필요했던 양쪽은 말수의 이런 진단에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과한 호감을 보였다. 당수는 아니어도 그다음 자리는 줄 수 있다는 제의도 있었다.
말수가 가진 장점으로 보아 그 정도는 어쩌면 과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만한 가치가 말수에게는 있었고 양대 진영은 그것의 값을 깎지 않았다. 팔려는 생각보다 사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언변과 그가 구사하는 영어와 일어, 중국어는 후한 점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의사라는 직업도 말수의 몸값을 높이는데 날개를 달았다. 더구나 부인도 의사이고 그 부인의 실력도 남편 못지않다는 소문이 퍼졌다.
독립운동을 하는 양 진영은 말수가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일시에 세력을 끌어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데 의심을 눈길을 두지 않았다. 말수는 지금 세력은 사회주의 쪽이 강하고 더 열성이지만 민족진영에 대한 눈길도 놓치 않았다.
양다리를 걸치고 여차하면 노선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목점 집주인은 중국으로만 본다면 사회주의에 붙으라고 했다. 장개석은 몰락의 징후가 보이고 모택동이 세를 급하게 불리고 있다고 했다.
민초들은 모두 모택동 편이라며 조선 독립도 그런 쪽으로 가야 탄력을 받을 거라고 조언했다. 한 마디로 모택동을 벤치마킹 하라는 충고였다. 미래가 아닌 현 상황을 놓고 보면 민족진영은 장래성이 희미하다고 못 박았다.
그런 식으로 나오니 말수는 형님이라면 어느 편이 좋으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자칫 자신의 속내를 시험받을 수도 있고 그가 어느 쪽을 택하든 말수의 결정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말수역시 무모한 행동으로 비춰질 결정적 말을 하기보다는 아끼면서 듣는 쪽을 택했다. 자신이 어떤 언행을 하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양쪽 진영에 소문이 흘러 들어갈 것을 알고 있었다. 포목점 집주인은 말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가 나올 때면 말수는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대일본 제국이라는 호칭을 늘 입에 붙였다.
그렇지요. 대일본 제국은 곧 베이징 상하이 만주에 이어 중국 전역에서 지배권을 확보하겠지요. 그것이 우리 조선의 독립에도 도움이 되고요. 결국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것이 아시아 각 나라의 독립을 보장하되 일본 중심으로 뭉치자는 얘기잖아요?
말수는 포목점 집주인에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당장 소문을 내라는 의미였다. 상하이는 일본이 잡은지 오래이니 이곳에서 활동하려면 일본을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고 말고요. 대일본 제국은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서양과 대적할 나라이지요. 그가 말수의 말에 동조하면서 콧수염을 장난삼아 말아 꼬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견을 달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서양눈치를 보면서 조계지는 손을 대지 않다가도 어느 날 점령했잖아요. 그래도 서양은 미적지근하게 나왔어요. 그럴수 밖에 없지요. 전투력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않았으니까요.
콧수염을 말던 손을 멈추고 부연설명하던 그는 그래서 의사 선생은 당을 만들 생각인가요? 아니면 당에 들어가서 당수를 밀어내고 접수할 생각인가요?
이런 노골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질문을 포목점 집주인은 했다. 정세에 대해서는 애매하게 말하다가도 개인의 문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물었다.
난감해서 대답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깨고 이번에는 말수도 피해가지 않았다.
상하이 신문을 보면 아, 형님도 늘 보시잖아요. 조선 독립운동은 이제 한계에 봉착해 있어요. 저는 당권을 잡아도 항일이니 독립이니 이런 것보다는 대일본제국과 함께 공존을 모색하는 그런 식의 운동을 하고 싶어요.
그것이 진정한 애국이지요. 여기 상하이만 해도 한인들이 제법 있잖아요. 그 한인들이 내국인과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지요. 독립이 별 거 있나요? 협조를 통해 최대한 조선민족이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이지요.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지금 운동은 방향이 틀렸어요. 다들 일본과 맞설 생각만 하지 손잡고 같이 가려는 단체는 없어요. 의사선생이 한 번 새바람을 일으켜 보지요.
제가 그런 능력이 있을까요? 하기사 일전에 뉴욕타임즈를 보니 협력과 상생이라는 사설이 있더군요. 힘이 약한 쪽이 센 쪽과 협상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전쟁보다는 낫다는 이야기더군요.
그래요. 선생의 장점은 바로 그런 것이지요. 능수능란한 외국어 실력은 미국이나 영국과 접촉하는데 큰힘이 될 겁니다. 의사자격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니 당장 당을 만들던지 기존으로 들어가던지 해서 명함을 새로 만들어야 해요. 그 명함을 가지고 서양과 접촉을 하면 위상은 자연히 높이집니다.
포목점 집주인이 말수를 재촉했다.
무력을 위해서도 비폭력을 하더라도 그쪽과 끈을 대야 합니다. 협력이 안 되면 둘 중의 하나를 택하거나 둘 다 선택 할 수 있다는 조언도 빠지지 않았다. 어느새 이야기는 일본은 쏙 빠져 있었다. 중국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서양편에 붙이라는 말인가. 말수는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는 포목점 집주인의 말에 현기증을 느꼈다.
형님이 보기에, 어느 쪽이 유리한가요?
말수는 참았던 그 말을 기어이 했다.
여기서 유불리를 따지는 것은 곤란해요. 독립운동은 손해를 보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그래요. 말을 좀 바꿀게요. 유리한가 보다는 조선독립을 위해 어느 노선을 택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글쎄요. 나도 감을 잡기가 어려워요, 국제 정세가 늘 봄바람처럼 사방에서 불어오니까요. 어제는 일본이 오늘은 미국이 서로 기선을 잡았다고 하니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확실한 신호가 올 때 그때 선을 대도록 하고요. 일단은 양쪽 다 접촉을 해보시지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대일본제국은 항상 옆에 있는 형님처럼 생각하지만 형님의 안전을 위해서도 모택동이나 서양과도 머리맡에 전화선 정도는 연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오후에 나간 말수는 이렇게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그리고 포목점 집사장 등 세명을 만났다. 분주하게 시간을 쪼갠 결과였다.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허기가 진 것도 모를 정도였다.
아내와 약속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나 말수는 상하이 시내로 나와 간단하게 딤섬을 몇 개 먹었다. 멀리서 대세계의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전쟁은 전쟁이고 놀이는 놀이다.
이 와중에도 춤추고 먹고 취하는 사람들은 어떤 부류의 인간들인가. 그는 자신도 곧 그 세계에 들어가겠지만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지면서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너무 빠르게 변신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이런 생각은 불과 일주일 전에만 해도 머릿속에서 조차 없었다. 그러던 것이 삼사일 전부터 꼬리를 물더니 딱 이렇게 됐다. 너무 빠르다. 멈추고 나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까.
말수는 그러기에는 자신이 너무 많이 앞서 왔다는 것을 느꼈다. 돌아가기에는 먼 거리였고 굳이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올 길이라는 확신이 섰다. 요 며칠 사이 그의 가슴은 뜨거운 불길에 휩싸였다.
거친 파도와 싸우는 뱃사람이었고 광산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면 쾌감을 느꼈던 바로 그 사내로 돌아와 있었다. 토하고 뒹굴고 까무라치고 죽어 나가는 한 달간의 긴 항해에도 멀미를 조롱하던 통영 뱃놈 말수의 근본이 살아나고 있었다.
찢어진 살을 거칠게 깊고 병든 다리를 톱으로 썰어 낼 때 느끼던 그런 기운이 퍼져나갔다. 온몸에 피칠갑에 얼굴은 인상을 쓰고 있지만 속으로는 흥분으로 들떴던 바로 그 말수의 심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지금 상하이는 너무 조용하다. 그런 환자는 거의 없다. 한 달에 한 건도 없을 때가 많다. 의사질은 시시해졌다. 뭔가 더 큰 자극이 필요하고 거창하고 흘러넘쳐야 한다.
그래,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독립운동쯤은 해야 사내자식이지.
말수는 진작 자신이 이 세계로 뛰어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철광석이나 니켈을 가득 싫은 만주행 기차를 폭파하자. 급하게 먹어 목이맸는지 그는 물을 벌컥 벌꺽 들이켰다. 배는 아직 차지 않았다. 기차바뀌가 하늘로 올라 마치 비행선처럼 날아가는 것이 눈앞에 선했다.
그러나 생각은 용희와 저녁 약속을 했으니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그는 천천히 대세게 앞으로 나아갔다. 일본 헌병 서너 명이 박자를 맞추며 인파 속에서 열을 지어 행진했다.
정말 대일본제국이야. 조계지까지 꿀꺽했어. 서양놈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지. 자기 나나라 마찬가지인 이곳이 넘어가도 싸우질 못해.
중절모를 세운 말수가 두 손을 깊숙이 포켓에 찔러 넣고 신사처럼 길을 걸었다.
용희도 서둘렀다. 아들은 간호사에게 맡겼다. 몇 번 그런 경험이 있어 간호사는 고분고분했다. 조선족 처녀로 일자리를 얻었다는 만족감이 컸고 간호사 직업을 천직으로 여겼다.
부부 침실 옆방을 내주자 좋아라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용희는 입술에 붉은 루즈를 칠했다. 너무 진하다 싶을 정도까지 칠하고 나서 거울 앞에서 구멍이 손가락 크기만큼 큰 뜨개질 모자를 썼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나로 모아주는데는 이만하면 모자람이 없었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은빛 나는 뿔테 안경으로 얼굴의 일부를 가렸다.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용희는 외출의 기분에 한껏 들떠 올랐다.
입이 쩍 벌어지는 무대 위의 서커스 단원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양쪽 호주머니가 크게 달린 스웨터를 입고 곤색 양장 치마를 입고 나서 거울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자신은 물론 누가 봐도 이만하면 귀부인으로 부족함이 없겠다. 오른손에는 적당한 크기의 붉은 핸드백을 잡으니 준비는 끝났다. 오늘은 굽이 좀 높은 구두를 신어야지.
용희는 마음속으로 신을 구두를 점 찍어 놓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젊은 귀부인의 옷차림에 만족하면서 그녀는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평소 같으면 조금 일찍 나와 걸어갔을지도 모른다.
이십 분 내외면 대세계에 닿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아한 모습으로 내려야지. 마부가 내민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사람들이 쳐다보겠지. 외국의 유명 배우가 왔는가 하고 목을 길게 빼고 웅성거리네. 하차감이 대단해. 말수가 그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요즘 좀 소원한데 계속 그래서는 안 되지. 우리 부부는 하늘의 신도 어쩌지 못해. 죽을 고비를 한 두 번도 아니고 적어도 삼십 번은 같이 넘겼어. 자, 오늘은 비싼 예술 공연도 보고 오래된 포도주가 있는 고급 식당에서 저녁을 먹자. 우아하게 아주 우아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