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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은 좋지만 믿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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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은 좋지만 믿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23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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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간이었다. 어느 것 하나 뚜렷한 것은 없었다. 말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알 수 없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괴로웠다.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말수는 초조한 자신 때문에 속이 상했다. 억지로라도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원하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면 주먹으로 쳐서라고 떨쳐내야 한다.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자.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 나가면 입을 다물자, 감당하는 것은 나의 몫이고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비록 그것이 치유될 수 없는 상처라 해도 잊어야 한다. 기억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상처가 아니다. 말은 안 해도 용희는 자신이 괴로운 이유를 알고 있다. 나의 눈빛이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간파했다.

말수는 그것이 미안했다. 상처를 덧나게 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다. 지금까지 잘해 왔는데 이게 무슨 낭패인가. 속에서 끓어 오르는 적개심을 억누르기 어렵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이럴때는 다른 누구도 아닌 못난 자신을 자책해야 하고 그렇게 했다. 학대에 이를 정도로 그런 상태가 되자 자연히 그 다음 순서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렇다치고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누구인가. 자연스럽게 일제 때문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그들이 조선에 오지 않았다면, 내가 통영을 떠나지 않았다면, 태평양으로 끌려가서 광산 노동자로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다면..., 뭐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이것은 단순 가정이 아니었다. 그 결과는 얼마나 참혹했던가.

극적으로 병원을 개업하고 나서 이제 그런 것 다 상관없다고 했는데 아닌 게 되고 있다. 술이 문제다. 술을 먹으면 과거가 취기처럼 떠오른다. 악몽이다.

마약을 끊어야겠다. 그것을 계속하면 파멸이다. 나보다도 용희가 먼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녀 없는 내 삶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용희가 무슨 죄가 있는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 말고 그녀가 내게 잘못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손가락을 꼽아 보았지만 하나 하나에 이유를 댈 수 없었다.

말수는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나약자가 되고 있다. 아니다. 말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강해, 강하다고. 이제는 울지 않겠다. 어떤 경우에도 소리 내면서 흐느끼지 않겠다. 절제하자. 술을 줄이자. 약을 끊자.

절제해서 잘못되는 경우는 없다. 내가 흔들린 것은 그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다시 나로 돌아가자. 병원에만 집중하자. 그런데 안 된다. 마음은 포목점 집에 가 있다.

권총 살 돈이 없다고 했다. 말수는 아내 모르게 조금씩 돈을 모았다. 용돈을 절약했다. 의사들 모임에 회비를 내야 한다며 손을 벌렸다. 용희는 의심하지 않았다. 모은 돈을 환전했다. 일천 달러 정도는 됐다.

아쉬운 대로 이것이라도 하자. 말수는 프랑스 조계지를 찾았다. 배불뚝이와 함께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그가 모르게 은밀히 해야 한다. 굳이 자신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사무원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운영자금에 쓰라고 넌지시 봉투를 내밀었다. 독립자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젊은 사무원은 황공해서 벌떡 일어섰다.

마침 주석님이 안에 계시니 만나 보라고 했다. 사무원은 그가 신분을 밝히지 않았으나 부부가 운영하는 병원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찰하는 와중에 언뜻언뜻 비치는 날카로운 인상을 그는 주석을 모시고 갔을 때 강하게 받았고 그 인상을 기억해 냈다. 하관이 빠르고 매서운 눈매는 웃는다고 해서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심하는 얼굴로 환자를 대했으나 눈에 살기가 아직 빠지지 않은 때였다. 사람을 죽이고 죽기 일보 직전에서 벗어난 사람의 얼굴은 쉽게 예전의 모습을 찾지 못한다.

젊은 그가 주석의 집무실인 이 층으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나무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냈다. 말수가 그 소리를 신호로 이만 가봐야겠다고 손에 든 모자를 집어썼다.

청년이 손을 잡았다. 그러나 말수는 아니라고 잡은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바쁘신 주석을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댔으나 사실은 주석에게까지 자신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싶었다. 그때 위층에서 김군 손님 오셨으면 모시고 올라와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수는 당황했다. 올라가야 할지 내려가야 할 지 망설였다.

여러 단상이 순간적으로 스쳤갔다. 그는 못 듣은 것으로 하고 청년에게 눈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잘한 결정이다. 자신을 드러낼 순간이 아니다.

병원장이 독립자금을 대고 있다는 소문은 그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특히 신변을 걱정하는 용희를 생각하면 그렇다. 그는 걸음을 빨리했다. 앞쪽에서 하오리에 게다를 신은 일본인 남자가 거들먹 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횡하니 불었다. 여기가 왜놈땅인줄 아나 보지. 만주를 먹었다고 중국 전체를 삼낀 건 아닌데 말이야. 말수는 그런 마음으로 남자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병원에 도착하자 안심이 됐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안전지대에 도착하고 나서 한숨을 돌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말수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자신이 임정에 들렀다는 사실을 용희에게 말했다. 

‘조용히 돕는 것이라면 반대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위험해 지는 것은 볼 수 없어요. 더구나 우리에겐 아들 환구도 있잖아요.’

용희는 말수와 이야기 할때면 환구 이야기를 곧잘 꺼내 들었다. 책임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의도적으로 하는 발언이었다.

‘우리야 어찌됐든 어린 환구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보살펴야죠.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고요. 환구가 결혼해서 아이를 앉고 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알겠어요. 여보. 나도 그렇게 되기를 두 손 모아 빌어요.’

걱정거리는 붙어 매라는 식으로 말수가 말했다.

‘우리는 우리식으로 애국을 하는 거예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용희가 진지하게 받았다. 

말수가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희는 남편이 임정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자금 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내자 이렇게 말했었다.

일종의 지침 같은 것으로 더는 선을 넘지 말라는 부탁이기도 했다. 같은 조선인으로 힘을 보태는 것은 가능하지만 일제가 쫓는 요주의인물이 남편인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말수도 동의했다. 전문적인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자신은 그러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환자를 보살피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나는 죽어도 의사고 죽어도 병원에서 죽을 것이라고 여러 번 용희에게 약속했다.

약속을 깰 만한 어떤 주변 변화도 없다. 설사 있다고 해도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간다는 말도 없이 임정에 갔다 왔어. 상의도 없이 말이야. 괜찮지?’

말수가 미안한 듯 물었다.

‘혹시 포목점 아저씨도 아나요?’

‘모르지. 당연히 몰라.’

‘잘했어요. 당신이 옳아요. 사람은 좋지만 믿기 어려운 구석이 있어요. 자금을 댄 것을 알면 일제 밀정에게 고자질할지 누가 알겠어요? 철저히 비밀로 해요.’

‘알았어, 여보.’

말수가 다가왔다. 그리고 가볍게 안았다.

‘당신을 힘들지 않게 할게. 난 덴노 훈장도 있어. 한 번은 그걸 써먹을 기회가 있을 거야.’

‘난 나보다도 당신을 믿어요. 하지만 훈장은 믿지 않아요. 그걸 써먹을 기회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알았어요. 여보. 당신 말대로 할게.’

‘한 번 했으니 뜸을 들여요. 임정은 당분간 발을 끊는 게 좋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미행하는 자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말은 이렇게 했으나 그날 이후 말수는 임정에 점차 발을 디디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는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했다. 다음에 주석을 만나면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미리 생각을 정리해 놓는 게 좋다. 우선 병력 이야기를 꺼내자. 싸우기 위해서는 군인이 있어야 한다. 테러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한두 명 해친다고 해서 독립이 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를 해치면 또 다른 하나가 오고 둘을 해치면 또 다른 둘이 온다. 한둘이 아니라 다 쫓아내야 한다.

조선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군인이 필요했다. 그는 배불뚝이를 통해서 임정이 일차로 조선총독부를 공격했고 이차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력이 얼마나 모일지 궁금했다. 거기다 모인 병력은 단순히 총 쏘는 병사뿐만 아니라 병사를 다룰 장교 인력이 얼마냐가 중요했다. 적어도 백 명 정도의 규모는 돼야 한다.

그래야 조선 땅에서 전투를 해 볼 여력이 생긴다. 상하이에서 그 정도 장교를 조선에 급파하고 이들이 은밀하게 조선 각지에서 병사를 훈련 시켜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까지 미치자 말수는 자신이 직접 장교가 돼 병사들을 통솔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총이라면 어떤 것이든 자신있다. 수류탄이나 폭약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내가 적임자가 아닌가.'

그러나 그는 그것을 실천에 옮길 확률은 제로라고 봤다. 나 말고도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석을 만날 필요가 있다. 머릿속에 있는 그의 생각과 내 생각을 접목해 보고 싶었다.

병력훈련과 자금 문제 그리고 조선 침투 루트를 개척하는 것 등 머릿속이 일사천리로 앞서 나갔다. 일본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 지금이 말수는 적기라고 봤다.

훈련된 천 명 정도의 병력이 일시에 조선총독부를 접수하고 총독과 정무총감등 식민지 수뇌부를 체포하면 일단 성공이다.

그런 다음 헌병대사령부와 주한일본군사령부를 점령하자. 그러면 승산이 있다. 친일파 제거는 그다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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