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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6 18:10 (화)
회오리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낮의 태양이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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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낮의 태양이 이글거렸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2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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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총공세를 펴는 것이 낫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떠났던 죽음이 그림자처럼 다가온다.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줄 것은 오로지 펄럭이는 깃발밖에 없다는 듯이 그 아래 뭉쳐 있던 병사들은 조금 전에 들었던 포 소리에 기가 죽어있었다.

자신들이 쏜 포의 위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적의 포 역시 그만큼 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억지로 괜찮다는 표정을 짓거나 죄지은 자의 어색한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담배를 피면서 긴장을 누그러뜨리기도 하고 별 것 아니라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는 자신의 인생이 심하게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가린 병사는 새로운 것을 시작할 엄두를 낼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알고는 고민에 빠졌다.

정의감이나 조국이나 하는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앞에 끝나가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 가벼웠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정막이 거대한 군함의 갑판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처음 와보는 낯선 곳에서 그들은 이방인이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이곳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저들이 곧 내 환자가 된다.’

말수는 내 환자라는 말을 되내면서 나와 환자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고 가깝다는 것을 인식했다.

달궈진 쇠붙이가 채 식기도 전에 장교가 옷을 털면서 먼저 일어섰다. 어지러운 탄피를 줍기 위해 나머지 병사들도 옷을 손으로 터는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대열을 정리했다.

그런데 무릎을 꿇었던 병사는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장교는 고함을 치면서 발로 웅크린 녀석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가 힘없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교도 부상을 당하겠지. 그도 내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까.’

말수는 장교의 발길질에 쓰러진 채 꼼짝 않고 있는 병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스스로 일어서고 싶지 않다는 듯이 일부러 몸을 갑판에 내맡겼다. 병사와 갑판이 자석처럼 붙어 있었다.

장교는 넘어진 그를 놔두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말수가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흐느꼈다. 어깨가 들썩였다. 

‘그렇게 울지 마.’

말수는 그를 다독였다.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이었다. 말수는 그를 껴안았다. 살아 있는 인간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가 눈을 떠서 말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갑자기 냉동에서 해동된 듯 깨어났다. 벌떡 일어선 그는 대열 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사태파악을 한 것이다. 부끄러웠던 그는 남보다 더 열심히 움직여 잃었던 자존심을 만회하려고 애썼다.

아직 일본군의 군기는 죽지 않았다. 다시 포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군함 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사이렌 소리가 갑판을 흔들었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반격하기 위해서는 공격지점을 확인해야 한다. 장교가 분주히 움직였다. 사수들은 표적을 재고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뜨거운 연기가 분출하는 화산처럼 끓어 올랐다. 포연을 빠져나온 탄피가 공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적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었다.

포사격이 빗나가자 군함의 적들은 뱃머리에 달린 기관총을 난사했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총을 잡고 있던 병사와 그 옆에서 보조하던 부사수가 쓰러졌다.

힘없이 쓰러지는 그들은 곧 죽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뭍에 올라온 고기처럼 배를 펄떡였다. 말수는 가방을 챙겨 급히 그들 쪽으로 달려갔다. 용희도 그 뒤를 따랐다.

적의 공세는 계속됐다. 첫 번의 공격에서 탄착점을 확인한 적은 그곳에 무차별 포화를 집중했다. 아까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통나무처럼 무겁게 자빠졌다.

장교의 고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도 쓰러진 것일까. 말수는 다가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사수와 부사수는 예상대로 즉사했다.

나머지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들은 꺼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려고 발버둥 쳤다. 말수는 쏟아지는 피를 막을 수 있는 붕대를 꺼내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그럴 것 없소.’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쳤던 장교였다. 어깨의 견장이 그가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갑판 위의 대장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나는 괜찮으니 다른 부상병을 돌보시오.’

그것은 지시였고 명령이었다. 죽지 않은 그는 죽을때 까지 명령을 내렸다. 장교의 위신을 세워 죽어서도 멋있는 장교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는 말수에게 매달려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허벅지를 관통당했는지 피가 억수로 뿜어져 나왔다. 말수는 급하게 지혈하기 위해 손바닥을 펴서 눌렀다. 용희가 다리 아래로 붕대를 넣고 감기 시작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보다는 더 싸울 수 없는 것이 분하고 억울했던 장교는 화를 참아서는 안 되지만 그에게는 소리치거나 흥분할 힘이 없었다.

적을 제압하지 못하고 제압당한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 상처의 고통보다 더 심하고 아팠다.

장교는 함장을 만나고 싶어했다. 마지막 순간을 의사의 손에서 죽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존경하는 함장에게 자신의 최후를 보고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끊어져 가는 생명줄을 간신히 잡고 있었다.

사무라이 전사로 깨끗하게 살아 명예롭게 죽는다고 최종 보고서를 올려야 한다. 그러나 그런 바람은 실천되지 않았다.

그는 곧 의식을 잃었다. 말을 하려고 나온 혀는 들어가지 않았다. 말수는 입을 벌려 혀를 제자리에 집어 넣었고 적에게 증오심을 보이던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뒤 집어진 눈꺼풀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말수는 장교의 품위를 지켜줬다. 지위에 맞는 행동을 했으므로 그것은 당연했다. 말수는 자신도 죽게 된다면 장교처럼 멋지게 가고 싶었다. 그러면서 죽을 때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내 이름은 후쿠다 요시오가 아닌 말수예요.’ 이렇게 말하면 괜찮을 것이다.

‘함장님이 곧 와요.’

용희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장교의 귀 가까이 입을 대고 말했다.

동정을 바라지 않았던 그는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떨궜다. 그것은 평소 그가 수없이 다짐한 결과였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비참한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고 마음먹은 대로 실천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달랐다. 특히 무릎을 꿇고 앉았던 병사는 하필 그 무릎에 총을 맞고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어디서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지 옆에 있던 동료가 놀랄 지경이었다.

살아서 그렇게 용기가 있었다면 총알도 피해갔을지 모른다. 그는 말수가 다가가자 옆에 있던 용희에게 총을 맞지 않아 자유로운 손을 내밀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였다. 용희는 간호와 의사의 직업정신으로 내민 손을 잡았다. 무릎을 관통한 총알은 내장을 뒤집어 놓았다.

전투복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부상의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옷을 벗기자 장기의 일부가 드러났다. 용희는 얼른 것을 가리기 위해 치마로 덮었다.

‘조금만 참아요. 살 수 있어요.’

용희는 언젠가 했던 그 말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말수가 피 묻은 손을 바지에 닦으며 용희를 힐끗 보았다.

잘하고 있다는 칭찬인지 입에 발린 소리는 이제 그만하라는 것인지 용희는 게의치 않았다. 지금이 중요하다. 부상한 병사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용희는 알았다.

‘살 수 있어요, 조금만 힘내요.’

그녀는 힘내라는 말이 병사는 물론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듯이 팔에 힘을 주면서 병사의 몸을 압박했다. 피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주사기를 꺼낸 그녀는 아직 의식이 있는 그의 허벅지에 강하게 찔러 넣었다. 들어갈 때 근육이 저항하는 느낌을 잠시 받았으나 용희는 무시하고 약물이 다 들어갈 때까지 잡은 주사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잠시나마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그녀가 할 일었다. 진통의 효과가 몸에 퍼지자 그는 잠시 억지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난 알아요. 내 고향은 가고시마예요.’

그는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인지 용희가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 조용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병사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아니 지금까지 드러낸 적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눈빛은 심지어 가장 존경하는 대상에게 바치듯이 아득하고 멀었다.

‘고마워요.’ 이 말을 남기고 무릎에 총을 맞은 병사가 죽었다. 그는 용희에게 고맙다고 했다. 무엇이 고마운가. 자신의 최후를 지켜준 것은 고향도 따뜻한 엄마 품도 아니었다. 그것이 고마운가.

용희는 하나의 죽음을 보냈고 연달아 또 다른 죽음과 마주했다. 그들은 죽으면서 전쟁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결같았다.

용희와 병사들은 이 순간 친구나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죽은 병사는 고향의 동휴이기도 했으며 휴의이기도 했다. 어쩌면 점례였는지도 모른다. 

용희는 그런 마음으로 죽은 자들과 이별했다. 한바탕 회오리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낮의 태양이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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