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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페르소나(1966)-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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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페르소나(1966)-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인가?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10.11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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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나 글로 다 표현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 재주가 부족하거나 주변머리가 없다면 더 그렇다. 난감하지만 그런 상황을 연출한 감독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화면으로 보고 느끼기를 바랄 뿐이라면 관객도 은근슬쩍 거기에 동참하기만 하면 된다. 억지로 알지 못하는 것을 그러려고 따라가면서 힘쓸 필요 없다.

영화를 보면서 쉬려고 했으면 쉬어야지 되레 그것이 고통이 되면 그런 영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 그런 영화인지 아닌지는 여러분 각자의 판단이지만.

잉그마르 베르이만 감독의 <페르소나>는 아무리 서두가 어수선해도 어떤 식으로든 시비에 휘둘릴 걱정이 없다.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주장을 하든 그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고 또 그걸 바라지도 않으면 영화평 역시 제멋대로 써도 된다. 그래야 보는 관객도 읽은 독자도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대로 몇 자 끄적여 보는 것이다.

유명한 연극배우가 있다. 여기서 유명하다는 것을 눈여겨보자. 유명하지 않으면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름이 없는 자는 죽거나 사라진다 해도 대중의 관심을 끌지 않는다.

그러니 누군가의 ‘관종’이 되고 싶다면 일단 유명해야 한다. 보글러 부인 엘리자베트(리브 울만)는 영화에서 이미 유명인사로 나온다. 그가 그러기까지의 과정은 영화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그는 죽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지만 갑자기 말을 잃는다. 연극 도중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

화면은 입원한 그녀가 정면을, 좀 더 친절하게 말하면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는 장면을 클로즈업한다. 그것도 얼굴만 그러니 눈과 코와 입과 그것을 받쳐주는 이마와 턱이 아주 크고 또렷하게 보인다.

너무 크다 싶어 얼른 다른 장면을 기대하고 싶은 관객도 많은 터이나 감독은 그러지 않고 오랫동안 정지 상태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 빠르지 않고 느리고 정지 화면이 참 많이 나온다. )

환자는 말도 없고 움직임도 거의 없다. 의사는 화가 나서 정신병원에 쳐넣어도 되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자신의 별장으로 가서 요양하도록 한다. 거기에 이년 차 간호사 알마( 비비 앤더슨)가 따라붙는다.

간호사는 그러기 전에 잠시 같이한 환자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유능한 간호사가 대신 간호하기를 원한다.

대체 뭐가 잘못됐는지는 알수 없으나 작정하고 그런 것이라면 정신적으로 배겨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와 함께 무인도로 떠난다.( 예술가를 존경하고 유명배우를 간호한다는 우쭐한 마음이 작동됐을까.)

이제 두 사람이 무슨 일을 벌일지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객들은 궁금증 때문이라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여기까지 온 관객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뭔가를 기대 해도 좋은 영화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알마는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직분인 간호사 업무에 열중이다. (아, 자신의 직업에 열의를 가지는 사람을 곁에서 보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말도 없고 행동도 없는 이상한 환자임에도 알마는 보글러 부인의 회복을 위해 그야말로 헌신한다.

그녀를 위해 알마는 남편에게 온 편지를 읽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머니가 어린 손주에게 하듯이 설을 수시로 푸는데 그것이 환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동공이 흔들리고 몸이 반응한다.

알마는 같은 여자라도 하기 힘든 오년 간 사랑한 유부남과의 관계, 해변의 나체 일광욕, 그것을 훔쳐보는 소년들, 그리고 소년 둘과 함께 했던 집단 난교의 추억과 그 추억이 가져온 황홀에 대해 거침없는 토로한다.

이때 알마의 표정은 절정에 올랐을 그 표정을 재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내밀한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알마는 자신도 위안을 받고 보글러 부인도 그러기를 바란다.

▲ 비비 앤더슨(좌)과 리브 울만(우)의 연기 대결이 볼 만하다. 둘을 끌고 가는 감독의 연출은 놀랍도록 신비롭다.
▲ 비비 앤더슨(좌)과 리브 울만(우)의 연기 대결이 볼 만하다. 둘을 끌고 가는 감독의 연출은 놀랍도록 신비롭다.

알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처럼 진지하게 들어준 부인이 되레 고맙다. 항상 언니를 원했던 알마는 친언니 같은 따뜻한 품을 부인을 통해 느낀다.

듣고 있던 엘리자베트는 고해성사를 들은 신부처럼 장막 안에서 흠칫 놀란다. 커다란 동공이 움직인다.

알마는 운다. 엎드려 서럽게 흐느끼면서 의대생 아이를 임신하고 중절했던 일, 그와의 사랑에서는 단 한 번도 소년에게서 느꼈던 절정에 오르지 못한 것을 고백한다.

환자는 입술을 움직인다. 뭐라고 짧게 말을 한다. 엘리자베트는 치유되고 있다.

알마는 이제 자신과 그녀가 정신적으로는 적어도 동질감을 갖고 있다고 판단한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새벽녘까지 알마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나도 당신처럼, 당신도 나처럼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서로 닮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는 정신적 일체감인가. 이때 한 화면에 두 여자의 얼굴이 잡히고 겹쳐진다. 반쪽은 알마 다른 쪽은 엘리자베트가 합성된다.)

산책하고 담배피고 술을 먹고 그런 과정에서 엘리자베트는 점점 좋아진다. 그런 기미를 관객들은 안다. 그 무렵 부인은 의사에게 편지를 쓴다.

그런데 여기서 극적인 일이 벌어진다. 마치 호러물처럼. 편지를 부치는 대신 알마는 그것을 읽는다.( 편지는 봉인되지 않은 상태다. 그것이 엘리자베트가 알마가 일부러 읽기를 원했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알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엘리자베트는 알마를 관찰했던 것이다. 비밀의 실토 다시 말해 알마의 우울했고 기뻤고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즐기고 있다.

자신은 이렇게 살고 싶은데 알마가 자신을 망치고 있다고. 그것도 아주 자극적인 방법으로. 그런 알마를 연구하는게 재미 있다고.

믿고 이야기했는데 배신감이 몰려든 알마는 자신이 구경거리가 된 것을 알고 분노한다. 짜증을 낸다. 침을 뱉는다.

간호 대신 공격적 성향을 보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숨은 과거를 말하게 하고 등 뒤에서 비웃었다. 넌 도대체 누구냐, 단 일분이라도 좋으니 말해라.

알마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환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사람인 이상 이 장면 충분히 이해한다. 누가 환자이고 누가 간호사인지 의심스럽다.

엘리자베트는 다시 움츠러들고 알마는 그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그녀의 남편이 오고 이제부터 누가 엘리자베트이고 알마인지 혼돈의 세계가 그려진다. 비가 그치고 해는 떴다.

이제 더는 평이 필요 없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읽기를 마치고 서둘러 영화를 찾아봐야 한다.

알마와 엘리자베트가 보여주는 섬세한 눈빛의 움직임을 어찌 보지 않고 말로 듣고 글로 읽는 것에 만족할 수 있을까. 가면 뒤에 가려진 두 여자의 숨 막히는 연기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한 번으로 부족하면 85분으로 비교적 짧은 영화이니 연달아 봐도 좋다. 그러면 조금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내가 엘리자베트가 됐거나 알마로 변하기도 하는 등 두 사람 사이를 징검다리 건너듯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국가: 스웨덴

감독: 잉그마르 베르이만

출연: 비비 앤더슨, 리브 울만

평점:

: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다. 얼굴 속에 숨은 내면이 진짜 내 모습이다. 그러나 내면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얼굴이 납처럼 두꺼워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래서 얼굴은 가면과 내면의 합체다.

아이를 싫어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 매달리는 아들, 고요한 방안에서 분신하는 승려를 보는 모성, 두 손 든 꼬마 옆에서 무서운 얼굴로 총을 들고 위협하는 군인, 손으로 입을 가렸으나 눈을 크게 뜨고 보는 것은 호기심 혹은 공포, 낙태와 그로 인한 혼란, 남편의 방문과 아내 아닌 다른 여자와 입맞춤, 이성과 의지와 본성의 충돌, 역할극 속에 내몰린 자아, 손아래 감춘 찢어진 아이의 사진, 빛과 어둠, 희망과 구원, 침묵과 떠벌임, 믿음과 배신, 무의식과 의식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환상 속의 길인지 경계는 모호하다. 트렁크에 짐을 정리하고 떠나는 사람이 부인인지 알마인지처럼. 이것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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