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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8 20:29 (목)
운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옳은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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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옳은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9.28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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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찾아간 곳은 먼 친척이 있는 전남 여수였다. 서천과 장항을 지날 때는 서러웠다. 기껏 닭 잡아먹고 사람 팬 것이 무슨 문제인가.

시절만 괜찮았다면 되레 그의 출세길이었을 도둑질과 주먹질이 이제는 그의 앞길을 막고 있다.

그러나 불과 한나절 만에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그는 실감했다. 이곳 타향에서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그가 반장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 도 않았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분주했고 그 분주함 가운데 그는 자유를 느꼈고 어떤 새로운 공기가 가슴 가득 차오르는 것을 알았다.

나룻배로 금강을 넘어 군산 땅에 도착했다. 해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머물 곳에 당도한 그는 서러움을 잊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무엇이든 빨리 포기하고 일찍 결정하는 그의 스타일은 군산에서도 먹혀들었다. 군산에서 일주일 넘게 머문 것은 그에게는 신의 한 수였다.

그 사이 반장은 일거리를 찾기도 했고 일제가 남긴 적산가옥 한 채를 처분할 기회도 얻었다.

수완 좋은 그는 술집에서 알고 지낸 일당과 합세해 살고 있던 식산은행 직원을 일제 앞잡이라고 내쫓고 다음 날 역시 은행 직원에게 헐값에 팔아넘겼다.

한 몫 챙긴 그는 뒤탈을 염려해 여명이 밝기도 전에 여수로 몸을 틀었다.

그는 기회를 엿보면서 일제가 망한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여수의 바람은 고향 보령의 바람과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했다.

갯바람이 불어올 때 그는 냄새를 맡는 개처럼 코를 끙끙대면서 이곳은 제2의 고향이라고, 이곳이 내가 살 곳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수소문 끝에 그는 먼 친척이 경찰로 있는 곳을 알아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결코 빈손으로 가지 않았다.

소고기 서너 근을 샀고 신식 모자 두어 개를 가져갔다. 경찰을 대할 때는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아는 그는 대번에 환영을 받았다. 기댈 언덕을 찾자 반장은 곧 그곳에 등을 비벼대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성실함과 꾸준함이 무기였다. 그는 인정받았다. 경계하던 8촌 친척은 그에게 머물 방 한 칸을 내주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경찰 일을 배웠다.

늘 인력이 부족했던 경찰은 눈치 빠른 그를 정식 경찰로 인정했다. 여수에 도착한 지 일 년 만이었다. 시험을 쳐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친척이 꾸민 사건에 그가 공을 세웠다. 공에 더해 돈과 선물을 뿌렸다. 보고는 서장에게 올라갔다. 서장은 그를 면담하면서 이 자가 자신을 더 높은 자리에 올려 줄 수 있는 인물이 될 것을 믿었다.

그가 제복을 입고 관내를 순찰하고 돌아왔을 때 서는 뒤숭숭했다. 여순사건이 벌어졌다. 폭도들이 난동을 부리니 모두 총기를 휴대하고 서너 명씩 짝을 이뤄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서울에서는 여수보다 더 난리가 났다. 반란자들을 하루빨리 소탕하라고 쉬지 않고 무전이 날아들었다.

그러기 전에 여수 주둔 14연대는 제주도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여수는 물론 인근의 순천 고흥 광양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점령한 곳에서 그들은 일제시대 호가호위했던 친일파를 죽였다. 명분 있는 살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경찰 가족을 찾고 지주를 물색했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들도 물망에 올랐다.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대통령은 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갓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군대를 파견했다.

군대는 군대로 물리쳐야 했다. 초반 기세를 올렸던 반란군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궤멸됐다.

살아 남은 일부는 지리산으로 도망갔다. 여수서 추격부대장은 반장이었다. 그는 놀라운 솜씨로 반란군들을 잡아들였다.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군인들도 혀를 내둘렀다. 남들이 이 일에서 빼주었으면 하는 작전에는 자원에서 나섰다.

소문을 들은 대대장은 목구멍이 메었다. 곁에 두고 싶어서 그를 군인으로 빼돌렸다. 그에게는 그날 오후 상사 계급장이 달렸다.

지리산 뱀사골에 달이 걸렸다. 반장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이렇게 좋은 일이 자신에게 닥친 것은 그가 운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옳은 일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는 지금 그 착한 일의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이 일이 끝나면 말하지 않아도 그는 장교로 승진할 터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기대하는 기색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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