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5 18:17 (목)
그가 말을 하기 전에 정태는 그런 변화를 감지했다
상태바
그가 말을 하기 전에 정태는 그런 변화를 감지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9.23 16: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가고 그 구름 사이로 노고지리가 찌리릿, 찌리릿 하고 쉴 새 없이 노래를 불렀다. 입도 아프지 않은지 계속 지져댔고 멈추지 않고 날개를 퍼덕였다.

하늘은 높고 적당히 바람도 불어와 새들은 자신들이 그러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하늘은 종달새의 천국이었고 그런 것이 정태는 싫지 않았다. 저들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어야 한다.

정태는 보지 않고도 몇 마리가 어느 높이쯤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고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감히 고개 들고 하늘을 볼 용기가 없었다.

그 순간에 녀석들의 소리가 멀어져 갔다. 날개를 편째 그 상태로 하늘로 솟구쳤다가 급전직하는 순간이었고 그 모습을 정태는 역시 보지 않고도 또 알고 있었다.

정태는 이번에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다. 땅 근처로 내려온 새들은 다시 올라가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새들의 정지 비행은 쌍발 비행기의 폭탄투하와는 다른 것이었다. 정태는 피하지 않고 태연스럽게 논두렁을 걸어가는 자신의 행보에 안도감을 느꼈다.

죽지 않고 살아서 이런 날을 보는 것이 너무 고맙고 미안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카빈 총알이 몸을 관통하지 않고 살의 어디 쯤에 박혀 고통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낮았던 새들이 다시 위로 올라갔으나 몸에 박힌 총알이 빠져나간다는 느낌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태는 담임에 대한 감사함에 목이 메었고 소고기 근을 전해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정태는 한 번 더 홍성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전출 간 담임을 수소문해 기어이 보답하고 싶었다. 그것이 사람 된 도리였다. 그런 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으나 정태는 그래야 된다고 믿었다.

코스모스가 앞다투어 피어났다. 비포장도로 사이로 꽃들이 무리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간혹 트럭이라도 한 대 지나가면 뿌연 연기가 꽃 들 사이로 마치 포연처럼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 가을이 가기 전에 정태네는 경사를 맞았다. 큰 아이가 태어났다. 산모나 아이 모두 무사하다고 산파는 말보다 손짓을 앞세우면서 정태가 기다리는 마당으로 나왔다.

‘공주님 나셨어.’

그러나 기쁨의 순간도 잠시 농사에 보탬이 되지 않는 딸이어서 정태는 실망이 컸다. 용순도 마찬가지였다. 사내자식이었다면 하고 바랐던 것이 틀어지자 정태는 속을 끓였다.

금줄을 치고 숯덩이와 그 사이에 해보다 더 붉은 붉은 고추를 걸어야 한다는 희망은 사라졌다. 정태는 초가 지붕 위에서 익어가는 고추를 한 번 쳐다 봤다.

'이제는 쓸모가 없구나.'

정태는 그런 생각과 동시에 지게를 짊어졌다.

‘하필 첫째가 딸이람.’

정태는 속으로 투덜댔으나 자식은 또 낳으면 됐다. 젊은 용순은 다음에는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받아들이고 포기하는 것이 좋다.

코스모스가 지자 동네 아이들은 꽃이 피었던 자리에 맺힌 까만 씨를 쪼개며 놀았다. 추수도 끝나고 첫눈이 내린 어느 날 담임을 한 번 더 찾아봐야겠다고 정태는 말했고 용순은 정성껏 만든 모시옷 한 벌을 싸주었다.

그 옷은 장에 가서 팔 것이었고 판 돈으로 옹기를 몇 개 살 요량이었다. 그녀는 눈앞에 잘 빠진 옹기그릇을 그려보다가 손에서 그것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살아있는 것은 모두 담임 때문이라는 것을 용순은 알고 있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옷 한 벌쯤은 해줄 수 있었다.

그래도 한 달 이상 베를 돌려 정성껏 만든 것인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도둑맞은 것도 아니고 불에 탄 것도 아니다.

‘생명에 대한 보답 아닌가.’

용순 역시 정태처럼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을 일찌감치 버렸다. 그런 복잡한 속마음도 모르고 정태는 군소리 없이 따르는 용순이 또 고마웠다.

겨울이라 명 년 봄이 지나서야 입을 수 있지만 솜 옷을 할 형편은 못됐다.

정태는 모시옷을 싼 보자기의 감촉을 느꼈다. 아쉽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용순의 손에서 그것을 뺏다시피 받아 들고는 등짐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용순 몰래 챙겨둔 돈으로 홍성 읍내서 소고기 한 근을 사서 병무청 건물로 들어갔다. 조금 떨렸다. 그리고 담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약간의 흥분을 느꼈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우선 멀찍이서 담임 자리를 확인했으나 그는 이번에도 보이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젊은 직원에게 다가가서 담임의 행적을 물었다. 일 년 전에 찾아왔었다는 사실도 상기시켰다.

젊은 병사계는 그사이 박박머리를 상고머리로 다듬었고 그래서인지 얼굴에는 제법 어른티가 묻어났다. 그가 말을 하기 전에 정태는 그런 변화를 감지했다.

그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아, 그분 그분은 돌아가셨어요. 장교로 자원입대했고 입대 13일 만에 철원 백마고지에서 사망했어요."

난처한 표정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태는 어머니 광산김씨의 사망 당시와 같은 약간 어찔한 기분을 느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