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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0:17 (금)
총알은 앞으로 나가지 않고 약실에서 조용히 대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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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은 앞으로 나가지 않고 약실에서 조용히 대기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10.29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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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로 향해 갈수록 끊겼던 총성이 더 자주 들렸다. 올라가려는 자와 그러지 못하게 하려는 자의 마지막 발악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고지의 5부 능선쯤에서는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시체는 겹겹이 쌓였다. 국군 복장 위에 인민군복이 보였고 그 위에 다시 국군 복장의 시체가 널부져 있었다.

죽은 자들은 군복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움직이지 않았고 숨을 쉬지 않았다. 피의 색깔도 노랗지 않고 모두 붉었다. 살았을 때는 달랐던 자들이 죽어서는 모두 같았다.

맨 위의 시체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질러 댔고 그럴 때마다 몸의 어디에서인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가 아군이든 적군이든 올라가려는 자들은 신경쓸 수 없었다.

떨어져 나간 발은 방금 몸에서 떨어져 나왔는지 원래 있던 곳에 붙어 있고 싶어서 떨기를 멈추지 않았다.

잘린 팔은 그 옆에서 그런 시도를 한 지 오래됐는지 잠잠하게 피만 내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피가 나가면 다리는 팔처럼 더는 주인에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병사들은 올라갔고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시체의 산이 산을 쌓아 올렸다. 포탄이 산의 높이를 깎았다면 시체의 높이가 그 내린 것만큼 대신했다. 그래서 산의 높이는 낮아지거나 높아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8부 능선에서 공방은 더 오래 걸렸다. 이곳을 지나면 정상을 지키려는 자들은 물러나야 한다.

올라가려던 자들은 내려간 자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준비해온 깃발을 꺼내 들 것이다. 깃발은 여러 번 주인을 바꿨다.

처음 깃발을 가지고 가던 자는 산의 초입에서 적의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태극기를 챙겨라.

소대장이 불호령을 내렸다.

앞서가던 분대장이 뒤로 돌았다.

그리고 아직 숨을 쉬고 있으나 머리가 없는 상병의 몸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뒤따라온 일병에게 태극기를 건넸다.

정상에서 깃발을 꽂아라.

분대장은 이런 말을 하고 다시 앞으로 달려나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아직은 적의 공세가 대단하지는 않았다.

띄엄띄엄 아래로 폭탄을 쏘기는 했으나 탄약을 아끼려는 기세가 역력했다. 그들은 최후의 결전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쓰기 위해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올라가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탄약을 가지고 가면서도 줄이기 위해 함부로 발사하지 않았다. 소대장은 소리쳤다.

조준 사격해라.

병사들은 그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래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앞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거나 마음이 달라지면 소대장의 명령은 바로 잊고 총을 마구 쏘았다.

사격중지, 사격중지.

소대장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는 어린 나이였어도 전투의 개념을 알았다. 지금 쏘는 것은 헛방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아직 고지는 더 가야 한다. 정작 쏴야 할 때 쏘지 못하면 고지에 올라간 든 무슨 소용인가. 되레 개죽음만 당할 것이다.

소대장은 목소리가 더 나오지 않을 때까지 소리쳤다.

사격중지, 한참을 외친 후에 총알은 앞으로 나가지 않고 약실에서 조용히 대기했다.

그러자 조용한 숲에 연기가 피어오르다가 멈추었다. 숲은 언제나처럼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가만히 있는 거라는 듯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소대장은 병사들을 숨을 수 있는 곳에 병사들이 숨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도 바위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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