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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6:02 (금)
그는 왜 도망가지 않고 산으로 다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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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도망가지 않고 산으로 다시 갔을까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9.28 17: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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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온다면 그는 이 길을 지나쳐 갈 것이다. 숱한 길 가운데 바로 이 길이다. 처음 와 봤지만 이미 지나친 것 같은 친근감이 몰려왔다.

다를 바 없었다. 고향 순천의 앞길과 서청 간부의 집 으로 가는 길은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았다.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하게 좁은 것과 그 좁은 것의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것이 똑같았다. 다른 것은 모두 검었기에 달빛에 그 길은 더욱 빛났다.

빛나는 길옆의 움푹한 곳에 그는 몸을 숨겼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참을만했으나 온기가 그리웠다. 어서 녀석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혼자 오지 않고 여럿이 오면 그들이 갈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는 데는 이골이 났다. 공격하기 위해서 혹은 방어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좀이 쑤셔 다리를 뻗칠 때도 시선은 언제가 원하는 쪽을 가리켰다. 무료함을 달래면서도 금새 다가올지 모를 적에 대한 기대감은 저 버리기 않았다.

마침내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의 끝까지 다다른 느낌이었다. 더는 갈 수 없는 곳, 한 바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적막한 공간에 나홀로 버려졌을 때 심장은 빠르게 뛰어올랐다.

그것은 몸속에서 입 밖으로 빠져나올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러기 전의 상태는 평온했다. 태풍이 오기 전에는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았다.

지금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일어나야 할 일이 뒤로 미뤄지면 되레 심심해 졌다. 생사의 위기를 벗어난 안도감이 아니라 어서 생과 사를 결정해 주는 그런 순간이 좋다.

지금도 그런 심정이다. 녀석의 목구멍에 구멍을 내던지 자신의 가슴에 총구가 들이닥치던지 어떤 것이든 결판이 나야 한다. 그는 늘 하던 식으로 전처럼 기다렸다.

달은 이제 머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추석상을 차려야 한다. 때때옷을 입고 조상을 찾아가 성묘해야 한다. 호석이 녀석은 잘 하고 있겠지. 서울로 간 아들을 그리며 호석 아버지는 문득 아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맘모스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는 딸 정순도 떠올려 보았다. 아내도 떠올렸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서 가족을 한 곳에 모았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식구가 달의 한쪽에서 비스듬히 손짓하고 있었다. 어서 오라는 것인지 이제 빨리 가라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당기는 듯 싶기도 했고 밀어내듯이 내치기했다.

권총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던지 손을 떼자 검지 손가락이 굽어서 잘 펴지지 않았다.

멀리서 두런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소리는 무리를 지어 다가왔고 발자국 소리는 그 보다 먼저 왔다. 그 무리 속에서 서청간부의 목소리를 따로 잡아내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 다가 올수록 목소리는 하나로 합쳐졌고 그 하나의 음성은 분명 그자가 입속에서 내는 소리였다. 그러나 호석 아버지는 행동하지 않았다.

그러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나가자마자 총 세례를 받거나 사로잡혀 모든 협상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한 두 놈은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선제 공격으로 조준 사격이 가능한 거리까지 잡아 두고 실행하면 최대 다섯 명 가지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다고 산속의 대원등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속이 풀리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살인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저 산사람 하나 죽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없었다.

무모한 짓은 실행하기 전에 멈추었다.

그는 숨죽였고 몸을 더욱 둥글게 말아 쥐었다. 소리가 다가왔고 명확했으며 놈들이 도망갔다는 말이 들렸고 이른 아침 다시 출동한다는 말들이 두서없이 들렸다.

상황은 정리됐다. 떠났던 대원 하나가 뒤 쫓는 서청에 쫓겨 먼저 은신처에 당도해 대원들을 이동시켰을 것이다.

그는 왜 도망가지 않고 다시 산으로 갔을까. 호석 아버지는 허탈했으나 대원들이 무사한 것이 한편으로는 마음을 쓸어내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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