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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0 06:03 (토)
그는 힘을 내기 위해 주먹을 쥐었고 총을 의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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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힘을 내기 위해 주먹을 쥐었고 총을 의식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9.25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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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자꾸 변했고 그에 따라 결심이 흔들렸다.

상황에 따라 처리하자.

호석 아버지는 닫힌 사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개는 없는지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한 쪽 구석에 몸을 숨기고 어둠에 익숙해 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문지방 앞에 신발이 세 켤레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는 부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 것이었다. 그가 결혼해 아들과 딸을 두었다는 소식을 서울서 순천에 내려와 있으면서 들었다.

단란한 가족이구나.

너도 나처럼 아들 하나 딸 하나 두었구나.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겠구나.

그 때 아버지가 없어도 서운해 하지 말거라.

그런 생각을 하자 한 번도 보지 못한 애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호석처럼 머리를 짧게 깎고 가방을 옆에 끼고 아이들과 달음질 치면서 학교에 가는 녀석,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여학생 가방을 들고 가는 딸은 또 얼마나 예쁜가.

정순아, 호석 아버지는 아들이 아닌 딸의 이름을 가볍게 불러 보았다.

서청 간부는 회의하러 읍내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구두나 군화같은 어른 남자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왔던 길로 되돌아 나오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부엌 쪽으로 눈이 돌아갔다.

돌아 갔다기보다는 그쪽으로 저절로 틀어졌다. 철이 자석에 의해 끌리듯이 본능적으로 발 걸음이 쪽문쪽으로 향했다.

냄새가 나는 듯도 했고 아닌 듯도 했다. 하도 오랜만에 맡아 보는 밥 냄새라 그것이 쌀로 만든 밥인지 아닌지 몰랐다.

얼마 후 기억은 돌아왔고 그는 살며시 부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것은 시나리오에 없었다. 영화 감독이 즉석에서 배우의 애드리브를 차용하는 것처럼 그는 사전 계획에 없는 결정을 내렸다.

부끄러운 짓을 미리 정해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연대를 호령하던 대령이 민가에서 밥을 훔쳐 먹는다니 말이 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런 것은 그의 몸에서 빠져 나가고 없었다. 대신 들어온 것은 허기를 채우려는 위장의 가쁜 손짓이었다.

어서 메꿔줘.

망설이지 말고.

그는 그러기로 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 한탄하지 않는 대신 호석 하버지는 그곳으로 들어가 밥 솥에 있는 밥을 되는 대로 퍼서 옷 속에 쑤셔 넣었다.

양쪽 주머니가 불룩 해질 때까지 마구 퍼 넣었다. 문득 내려다 보니 주머니 두 개에 흰 쌀밥이 삐죽하게 뛰어 나왔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아닌 먹는 밥이었다. 그는 서둘렀으나 할 것은 다 했다.

그 와중에도 훔쳐 먹은 것을 표시 나지 않게 고르게 밥을 펴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무리 하는 이런 침착함은 오래 전투 경험에서 오는 습관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그의 좌우명이면서 부하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그것을 몸소 실천했고 실천했으므로 자신에 대한 약속을 지켰다. 집을 빠져 나와 그는 서청 간부가 오는 길목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밥을 입으로 가져갔다. 정신 없이 먹을 줄 알았는데 역시 그는 노련했다. 물이 없는 것을 알자 천천히 씹어서 삼꼈다.

그것은 급하게 먹는 밥에 체하지 않도록 하는 방책이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부지런히 주머니 속을 들락거렸다.

그때 서청 간부가 지나갔다면 잡지 못하고 놓쳤을 지도 모른다. 먹을 때 그는 잠깐 정신이 나갔다. 개도 먹을 때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듯이 그는 온전히 먹는데만 집중해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아무런 걱정이나 근심이 없었다.

수류탄이 눈 앞에 터져 잠시 고막이 나가면서 정신까지 함께 데려간 것과 같은 상태였다. 그는 만주 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도 반란군을 지휘하던 대장도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쇠약해져 이제는 누가 슬쩍 밀기만 해도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는 산송장과 다름 없었다. 쉬고 있는 숨은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죽지 않기 위해 그저 들락 거릴 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밥풀때기를 떼면서 호석 아버지는 간도 시절도 이 지경은 아니었다고 울컥했다. 그 와중에 눈물이 나왔다. 한심한 일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그는 이제 눈물이나 흘리는 가엾은 존재였다. 달이 크지 않아서 다행이다. 녀석이 보고 있었다면 부끄러움에 쥐 구멍이라도 들어갈 판이다.

조심해서 먹었어도 목이 막혔다. 컥컥 거리는 것이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논가 개울쪽으로 몸을 옮겼다. 목을 축였다.

목에서, 가슴 께서 멈췄던 것이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 갈 때는 막혔던 둑이 터질 때처럼 갑작스럽게 밑으로 향했다. 덜컹 하고 나무토막 쏟아 지는 소리가 들렸다.

간도에서도 이렇게 굶지는 않았어.

호석 아버지는 하나마나한 말을 지껄였다.

가을 달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추분이 지나 낮은 밤보다 짧아 졌고 달은 아까보다 부풀어 올랐다. 추석이 멀지 않았다. 남들은 떡을 한다고, 옷을 산다고 들떠 있을 연중 행사에 호석 아버지는 이게 무슨 꼴인가 자신을 뒤돌아 봤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한 인생에서 후회는 없었다. 간도에서 토벌대를 상대로 싸울 때도 마음은 언제는 아래에 있지 않고 위에 있었다.

꺼져 가던 불씨가 살아나고 있다. 그런 심정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비록 죽을 목숨이고 그 목숨이 가까이 다가 오고 있으나 인생의 후회를 결코 떠올리지 않았다.

그는 힘을 내기 위해 주먹을 쥐었고 가슴속의 권총을 의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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