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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6:02 (금)
대원은 넓은 길이 아닌 왔던 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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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은 넓은 길이 아닌 왔던 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9.23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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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을 때라면 굳이 찾을 이유 없다. 최악의 상황에서 그는 옛친구를 만나러 간다. 막다른 골목에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두렵고 서럽다.

이런 적이 없었다. 만주에서도, 토벌대에 쫓기던 눈보라 치는 간도의 들판에서도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파괴됐다. 몸은 물론 마음도 사그러 들고 있다. 지켜야 할 선이 무너지고 있다. 완전히 그러기 전에,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지기 전에 그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계곡물은 아직 얼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아마 내일 아침일 지도 몰랐다. 땅도 얼 것이다. 나무도 얼어서 소나무 껍질도 벗기지 못할지 모른다.

입에 넣을 것이 없다. 풀칠할 것도 없다.

그가 친구인가. 호석 아버지는 자문했다. 그리고 아니다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친구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 흔들고 다시 끄덕였다. 혼미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뒤죽박죽 된 머리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계곡이 퍼져 넓은 내를 이루는 개활지에 왔을 때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 대로 로왔다. 이제는 샛길로 혹은 좁은 골목길을 찾지 않으리라. 당당하게 걸어가자.

손들엇.

누구냐.

움지이지 마.

소리 치더라도 하나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기 전에 알 수 없는 곳에서 총알이 날아와 가슴 한 복판에 명중했으면 했다.

그래서 아픔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잠시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짧은 생각 후에 숨이 멎었으면 원했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피하지 못하고 가는 길은 사뿐 할 수 없다. 호석 아버지는 옆에 있는 대원을 걱정했다.

자신은 이미 다 내려 놓았다. 그가 여기서 차라리 서울이나 아니면 이름 모를 어느 섬으로 도망쳤으면 싶었다.

자신을 따라 다녀서 이득볼 것이 없는데도 무슨 애국심이 하늘까지 뻗쳐 이 고생이란 말인가. 그는 흘깃 곁눈으로 그를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를 더 가자 두렁의 구석진 곳이 나타났다. 두 사람이 눕기에 적당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그만했다. 몸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자 남은 기운이 빠져 나갔다. 더는 없을 것 같은 것이 몸에서 나가자 이제는 정말로 남은 것이 없었다.

겨우 눈을 뜨자 서산으로 넘어가는 붉은 해가 춤을 췄다. 추분도 지났으니 이제부터는 밤의 길이가 더 길 것이다. 아직은 괜찮지만 해가 지고 나면 추위 때문에 더욱 주릴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담배를 말아 피웠다.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냄새 따위로 위험에 처하는 것을 무시했다.

한모금씩 나눠 피면서 태어나서 자라고 죽는 인생에 대해 짧게 대화를 나눴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호석아버지는 대원에게 탈출해도 좋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어디든지 가.

가고 싶은 곳이 없어도.

고향은 말고.

함양으로 가선 안돼.

놈들이 지키고 있을 거야.

대원은 멍하니 아무 표정 없이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그도 부모 형제가 있고 처자식이 있다.

눈에 밟히지 않을 수 없다. 총을 버리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산을 타고 도시로 숨어 들거나 섬으로 가서 한 십여년 죽은 듯이 살 수도 있다.

이름도 바꾸고 얼굴도 바꾸고 성격도 바꾸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다 바꿔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열 달 후에 다시 세상에 나오면 되는 것이다.

어려울 것이 없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 대원은 그의 말을 따르고 싶었다. 그러나 한 순간 그는 주저했다. 차라리 가라고 총구를 겨눠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마지 못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호석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최후로 믿고 있는 협상의 결과를 기다린 다음 결정하자는 듯 했다.

그렇다면 나를 떠 본 것인가. 대원이 성급하게 그러마 하고 말하지 않은 자신의 결정은 잘 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호석 아버지는 하던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듯이 한 마디 더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살지 못하고 죽는다.

그 말을 듣자 대원은 주저 하면서도 과감하게 가슴속에서 총을 꺼냈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했다.

어디든 살아 있어요.

그러고 나서 만납시다.

이 말을 남기고 대원은 넓은 길이 아닌 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왔던 길로 들어가는 대원의 모습을 호석 아버지는 지켜 보다 잠시 잠이 들었다. 일어 났을 때 사방은 어두웠다.

그는 산 사람의 본능으로 주변을 살폈다. 귀를 기울였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주변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몸을 더 납작 엎드렸다.

어디선가 일성호가는 소리가 들리는 대신 두런 두런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타작한 것을 지계에 지고 내려오는 농군들의 소리였다. 그들은 군인들이 산으로 몰려 가고 있다는 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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