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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5 18:17 (목)
이른 아침 그는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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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그는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9.17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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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피아골에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날은 하루가 달랐다. 계곡의 상류는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위에서부터 붉은 물이 흘러 내렸다.

마치 산자의 몸에서 나온 것 같은 핏빛 단풍이었다. 빛이 선명해질수록 날은 차가워졌다. 여름 옷으로는 겨울을 나기 어려웠다. 고픈 배 때문에 수그러진 몸이 더 아래로 굽었다.

호석 아버지는 결심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춥고 허기진 동료들은 그가 어떤 결정을 내려 주기만을 기다렸다. 생사를 함께 하자고 약속했으니 나몰라라 하고 떠날 수는 없었다.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한계는 남아 있었다. 다다르기 전에 결정해야 그나마 남은 전우애를 지킬 수 있었다.

남은 동료들은 겨우 13명이었다. 일개 분대도 안되는 규모였다. 이것으로는 혁명은 커녕 도둑질도 하기 어려웠다. 체게바라가 삼십 삼명이 와도 부족했다.

하루 아침에 유명해 진다고 하더니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산사람들은 실감했다. 무모하게 덤벼들은 자신을 후회할 시간조차 없었다.

막바른 골목으로 내 몰리면서 그들은 애써 태연한 척 했다. 남은 담배를 나눠 피고 군가를 부르고 지치면 해가 있는 곳에서 낮잠을 잤다.

간혹 개꿈도 꿨으나 부질없었다. 깨고 나면 슬픔은 더 커졌고 가망없는 나날에 피로감은 더해졌다. 그들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서로 주소를 묻고 안부를 전했다.

헤어질 절차는 끝났다. 명령만 있으면 각자 알아서 산을 내려가면 된다. 어디서 어떻게 살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했다.

잡히면 동료를 불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같은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런 것은 부질없었다.

아무리 다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리고 설사 사실대로 이야기 한들 누가 믿어 줄 것이며 그렇다고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석방될리도 없었다.

그들이 한 일과 그들이 한 일 이상으로 벌을 주려고 작정하고 있는 자들과의 간격은 컸다. 누구도 그 사이를 메꿀 수 없었다. 그러려고 시도할 수도 없다.

한때 연대를 호령했으며 사단까지 세를 키웠고 여수는 물론 순천 인근까지도 장악했었다. 경찰서를 접수하고 투항해 오는 군부대를 끌어들였다.

세는 커졌고 서울로 가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준비 부족이었다. 작정하고 한 것이 아니라 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

되는 데로 시작한 것이었으니 커지는 규모를 감당할 수 없었다. 뚜렷한 목적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제주도 토벌 작전 지시에 따랐으면 어땠을까.

자책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 마음 속에는 감정에 격해 지주나 경찰을 괴롭힌 것이 걸림돌로 자리 잡았다. 사뭇친 원한의 개인 복수극이 끝나자 당황했으며 반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초반 기세는 우르르 무너졌다. 수해 지역의 토사가 한꺼번에 쏟아지듯이 덮쳐왔다. 호재 없이 치고 올라갔으나 이제 약발이 다했다. 작전주들이 진입해 오자 그들은 그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풀풀이 흩어졌다.

도망가다 죽은자들의 시체가 길거리에 나뒹굴었다. 명령권자와 그를 지근 거리에서 보좌했던 핵심자들은 산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나오지 않고 버텼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대책이 없었다.

덮칠 수 있는 민가는 파괴됐다. 산사람과 소통을 철저히 차단한 당국은 그들이 간 발자국을 따라서 빠르게 전진했다.

단풍잎 아나가 아래로 흘러갔다. 선택지는 둘이었다. 사느냐 죽느냐. 햄릿이 아니어도 누구나 그 상황이 되면 그런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살기 위해서는 자수해야 했다. 죽기 위해서는 최후까지 저항해야 했다. 자수한다고 산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생명 연장은 가능했다.

감옥에서 무기징역을 받으면 죽을 때 까지 살 수 있었다. 그런 삶을 기대하는 대원도 있을 것이다. 잘 하면 복무 우수생으로 20년 후에는 나올 수 도 있다.

손가락을 꼽아 보면 환갑 전에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살아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하겠다고 무너지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항은 무의미 했다. 동력이 없었다. 싸우는 이유가 사라지면 사기는 땅에 떨어진다. 떨어진 것으로는 손에 든 것을 대적할 수 없다.

차라리 여기가 간도였다면, 호석 아버지는 생각했다. 죽더라도 동지들과 함께 죽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내 나라를 찾기 위한 전투는 고귀했으며 전투중에 죽는 것은 애국이었다. 애국을 생각하자 호석 아버지의 가슴은 다시 뜨거워졌다.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해방전쟁이다 라고 외쳤으나 명분도 힘도 약했다. 그는 부하들을 설득해 살기를 원했다. 내가 지시했고 내가 명령했으니 너희들은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죄는 내게 있고 너희들은 군인으로 따른 것밖에 없으니 죄는 무겁지 않고 가벼울 것이라고 다독였다. 위로의 말에 안도하는 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로당원 하나는 끝까지 싸우자고 말했으나 따르는 동료가 없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인사했고 마지막으로 호석 아버지와 단둘이 애기 하기 위해 동료 들과 조금 떨어졌다.

산에서 죽겠다, 고문당하지 않고 살 때까지 살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겠다. 후회가 없는 당신의 의지가 아닌 내 의지 였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그는 산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올라가든 내려 가든 그러지 말라고 이제 누구도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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