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눈빛으로도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상태바
눈빛으로도 그것을 알 수 없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9.03 18: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쉬고 싶지 않았다. 뛰는 것이라면 많이 해봤다. 해당화가 가득한 해변을 달렸다는 이야기는 하고 싶다.

그 시절의 행복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다. 성일의 일이라고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석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 역시 위치와 시기만 달랐을 뿐 바닷가를 마냥 달렸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걷는 다고 하겠지만 분명 그는 달리고 있었다.

보령이 아닌 여수의 어느 해변이었다. 해 뜰 무렵이었다. 해는 언제나 머리 위에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둠을 밀어내는 해가 저쪽에서 붉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 비스듬이 있지 않고 언제나 도화지 가운데에 있던 해가 고개를 뒤로 젖히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잠이 많은 어린 시절이었고 내키는대로 살던 때였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그를 깨웠다. 일어날 시간이 아니어서 그는 힘에 겨웠다.

억지로 눈을 떠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흐릿한 형상 뿐이었다. 그때를 기억하느냐고 묻은 독자가 있다면 예스라고 대답할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점점 커가면서도 어릴적 그 장면이 수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장면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는지 아니면 상상속에서 되풀이된 기억이 사실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른다.

그것까지 어찌 알겠는가.

아버지는 젖은 옷을 입고 있었다. 수염은 깎지 않아 까칠했고 볼은 홀쪽하게 들어가 있었다. 자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데 엄마의 이런 저런 다급하게 묻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동네방네 떠들 일이 아니라는 듯이 엄마는 무릅으로 다가가면서 이렇게 속삭였다.

밥은 먹었어요?

어디 아픈 데는요?

혼자 왔나요?

아버지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모른다. 고개만 끄덕이거나 눈짓만으로 대신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무슨 말이라도 했다면 엄마는 틀림없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말없던 아버지는 여전히 비몽사몽을 헤매는 나를 안고서 그냥 밖으로 나갔다. 더 지체하면 큰 일이라도 날 듯이 문을 밀고 나섰다. 그것이 나름대로 대답하는 아버지의 방식이었다.

말없이 방안에 계속 있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엄마가 따라왔다.

언제 왔는지 누나는 엄마 치마에 찰싹 달라 붙었다. 새벽달도 따라왔고 무서움을 달래려고 작은 황구가 아직은 앳된 목소리로 짖으면서 뒤따랐다. 그렇게 우리 식구는 여명이 오기전에 바다로 왔다.

마침 해당화 피는 오월이었다. 사방에서 향기가 코 속으로 들어왔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은 덜 깬 잠 때문이기도 했지만 해당화 때문이기도 했다.

얼핏 핏빛 같은 붉은 꽃들이 무더기로 몰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쪽으로 아버지는 호석을 안고 달렸고 엄마는 누나 손을 잡고, 황구는 잠이 덜 깼는데도 좋아서 마구 달려왔다.

아버지 손안에서 호석은 화약 냄새를 느꼈다. 어깨에 맨 총에서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잤는지 깼는지 호석은 알지 못한다. 그 뒤로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어린애들은 그날 있었던 일을 금방 잊는다. 왜 기억이 없느냐고 묻는 것에 대한 대답이다. 한동안 아버지는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불쑥 나타나서는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구별못하는 곳에서 손을 내밀었다.

입으로는 무어라고 말을 하는데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어떤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고 수긍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눈빛으로도 그것을 알 수 없었다. 동공은 가만히 있지 않고 마구 흔들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뒤에서 갑자기 껴안았는데 놀라서 깨면 멀쓱 하게 웃고는 그냥 사라졌다.

꿈이야기를 호석은 엄마에게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도 눈치는 있어서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해서 손해보는 일이라는 것을 본능이 알고 그렇게 시켰다.

오른쪽에 낀 가방을 왼쪽으로 옮기면서도 멈추지 않고 호석은 내쳐 달렸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유없이 달리면서 멈추지 않는다. 쳐다보는 시선도 아랑 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여유있는 웃음과 손짓까지 해보여 과연 저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도 계속 달리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게 만든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을 호석은 계속 앞질러 갔다. 목적지가 있으니 쉴 필요가 없다. 미친사람보다 얼마나 행복한가.

그곳에 가면 무덤들이 즐비하게 있을 것이다.

누가 파가지 않았다면 봄에 보았던 무덤들은 그 자리에서 무덤으로 그대로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구의 무덤도 아닌 바로 왕들의 무덤말이다.

능이라고 했다. 묘도 아니다. 이름만 다른 것이 아니라 크기도 달랐다. 그곳에서 호석은 어떤 위안을 받았다. 이유 없이 편안한 상태를 한 번쯤은 다 들 경험했을 것이다.

그냥 무덤과 무덤 사이의 공간에서 잠시 있을 때 몸에서 무언가 빠져 나가고 들어오고 하면서 가볍고 무겁고 또 나른한 것이 온 몸을 사로잡았다.

언젠가 다시 오리라. 그때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아니라 혼자 오리라 호석은 다짐했었다.

그것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어둠이 완전히 내리고 나서 호석은 동구능에 도착했다. 능을 지키는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갔는지 주변은 고요했다.

허기가 몰려왔다.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 했으나 배고픈 것이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 것은 능의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 였다.

바람이 불고 좀 추웠다. 그러나 견딜만 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붉은 칠을 한 건물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거기서 하룻밤을 지샐 작정이다.

누울 자리를 확보하고 다리를 뻗었다. 봄에 느꼈던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것을 더 느끼기 위해 호석은 자신있다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 했고 그러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인생은 얼마나 버거우냐, 얼마나 즐거우냐. 그는 쏟아지는 잠을 참으면서 비스듬히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봤다.

그대로 일어나서 머릿속을 한 번 더 정리하고 싶었다. 무덤이나 한 바퀴 돌아볼까. 그러나 잠은 어느 새 호석의 몸을 지배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