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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4 11:56 (수)
그의 손에는 흰 옷으로 만든 백기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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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에는 흰 옷으로 만든 백기가 들려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8.28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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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것의 대가는 크고 오래갔다. 역사와 민족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거창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보라, 그 자의 행각을.

그 때 호석 아버지가 귀찮아 하지만 않았어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갈라진 국토가 이어졌을지 모른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런 가정은 꼭 필요한 것이다. 되풀이 하지 않을 역사를 위해서도 말이다.

오로지 출세만을 위해 달리는 자라는 것을 호석 아버지도 모르지 않았다. 설마 그 정도일줄이야 하는 그것 때문에 그는 또 한 번 땅을 쳤다.

귀찮음과 설마 이 두가지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그가 속한 민족을 구렁으로 몰고 갔다. 뒤늦게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존재로 커버렸다.

정식 군복을 입고 완장을 찬 그는 짙은 선글라스 아래서 작은 키로 높은 곳을 내려다보는 황당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간도의 일은 잊고 남로당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목소리를 높인지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남로당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그를 알아본 호석 아버지는 그때 그를 어쩌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 보다는 여기는 간도가 아닌 조선땅이므로 머리를 맞대고 같이 살기를 원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독립군 가운데 한 명이 저 자는 악질중의 악질이므로 반드시 처단하자고 여러차례 말했으나 만류하면서 그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대신 변명했다.

죽입시다.

그래도 이런 말을 하면 호석 아버지는 그러지 말라는 듯이 손을 뻗으면 용서하는 자는 살려 준다는 원칙이 개인과 상황에 따라 흐려져서는 안된다고 다독였다.

그 자는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당원 단합대회에 나와 다시 한번 토벌대의 죄과를 말하면서 용서해 주시면 동지들의 수족이 되겠다고 거듭 맹세했다.

마치 성당의 고해성사를 하는 심정이라 그 자가 말을 마쳤을 때 실제로 상담에 능한 신부님이라고 해도 그의 거짓을 알아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 자는 절박한 말과 눈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은 혼백이 나간 상태였고 이제 그것이 다시 돌아왔으므로 남로당원으로 조국 통일 과업에 매진하겠다고 엎드렸다.

호석 아버지는 목 뒤를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묻은 흙을 털어 주면서 남로당 가입 원서를 내밀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 석자를 적어 넣었다. 그때 그는 혈서를 쓰는 대신 호주머니에서 꺼낸 만년필 사인으로 자신의 충성을 대신했다.

그랬던 그가 호석 아버지를 배신했다. 그는 반란군에 참여하지 않고 토벌에 앞장섰다. 지리산의 가장 깊은 곳까지 제일 먼 저 온 그는 자수하면 살려 주겠다고 마이크를 들이댔다.

그자의 목소리인 것을 단번에 알아챈 호석 아버지는 그자에게만큼은 체포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난사하면서 반대편으로 달아 났다.

마지막 실탄이 떨어지자 호석 아버지는 천천히 손을 들고 은신처에서 나왔다. 손에는 흰 옷을 벗어 만든 백기가 들려 있었다.

그 무렵 제주에서는 처참한 일이 진행됐다. 서북청년단이 중심이 된 군부대는 중산간 지역을 초도화 시켰다. 움직이는 것은 무조건 사살했다.

사람이나 개돼지나 말 등이 총을 맞고 고꾸라졌다. 흘린 피가 숨골을 따고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우물을 깁던 아낙들은 퍼올린 물에서 핏기가 가득한 것을 보고 기겁했다.

피다.

그들은 이런 소리를 질렀다. 이 소리는 처음으로 그치지 않고 무려 5년 이상 지속됐다.

솜뭉치로 햇불을 만든 자들은 3인 1조로 움직이면서 초가집을 태웠다. 불이 탈 때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한 늙은 노인이 불이다 소리치면서 죽었다.

불에서 나와 달아나지도 못하고 벌벌 떨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살려 달라는 아녀자들은 발로 세게 걷어 찼다.

아파.

그녀들은 넘어 지면서 이런 소리를 질렀다. 썩은 고무나무처럼 자빠지면서 소리쳐 울면 재수 없다며 발을 위로 들고 한 번 더 내질렀다.

일어나서 살려 달라고 같은 말로 애원하면 골치아프다고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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