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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석에 대해 성일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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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석에 대해 성일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7.16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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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석이 왜 갑자기 학교를 그만뒀는지에 대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기는커녕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는 사실을 아는 아이들도 없었다.

대개 아이들이 그렇듯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구나 관심을 끌 만한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날 이후로 호석은 학교와 반 아이들 사이에서 기억처럼 존재도 사라졌다.

그런 아이라 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면 한동안은 화제가 될 수 있다. 그곳이 주유소 같은 아이들이 일하기에는 조금 험한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성일은 호석이 속된말로 기름쟁이가 된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것을 빼놓지 않으려는 사명감 같은 것도 없었다.

그 반대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급 차에 앉아 거드름 피우는 모습을 봤다고 해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 인생은 이제 나와는 완전히 작별이었고 어떤 일로도 엮일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아이들에게 떠들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그 일에 대해 지금도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나서 떠들지 않은 것은 그 이후 지금까지 지켜오는 신념이다.

한 때 알고 있었던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굳이 남이 알고서 말한다면 몰랐던 사람처럼 조금은 놀라면서 그러냐 하고 잠깐 호기심 같은 것을 비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뿐이다.

성일은 다른 아이들이 봐서 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자기의 입으로는 끝까지 발설하지 않기로 한 결심을 뒤집지 않았다. 그것은 먼저 약속을 지키겠다고 한 약속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는 것이 호석에 대한 일종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워했으나 지금은 그런 감정이 없었다.

이제 그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고 상관이 없는 사람을 굳이 찾아서 미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써도 될 만큼 충분한 뇌 용량도 없었고 차지하고 들어올 빈공간도 없었다.

그에 대해서는 무슨 말도 하지 않기로 하고 실제로 입을 봉해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 마음이 편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그것은 호석을 잊기로 결심한 직후에 떠오른 단상이다. 없애려고 하면 더 기억나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 어떤 환상과 같은 것이 성일을 감싸고 돌았다.

정신무장 교육을 하면서 교련 선생은 무슨 반란 이야기를 꺼냈고 그 말을 할 때 시선이 호석에게 꽂혀 있었다.

마치 화살이 원하는 과녁에 박힌 것처럼 그것은 누가 와서 빼내기 전에는 절대 빠지지 않겠다는 견고한 의지가 교련 선생의 눈에서 이글거렸다.

장난질하다 걸렸기 때문에 그런 것 이라고 생각했으나 갑자기 호석이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그 이유라는 것을 돌이켜 보니 어떤 반란과 호석의 자퇴가 알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된 것은 아닌가 궁금했다.

계속 노려보던 교련 선생은 그런 빨갱이 자식들이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할 때도 시선은 호석에서 떠나지 않았고 이제는 반 아이 모두가 그 대상이 호석인가 하는 호기심으로 선생의 시선을 따라 호석에게 옮겨 갔다.

호석은 가만히 있었지만 얼핏 슬픈 표정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 그 일을 까마득히 잊었는데 주유소에서 호석을 발견하고 난 뒤는 그 일과 호석의 일이 자꾸 겹쳐졌다.

어떤 것은 누구에게라도 물어보지 못하는 사안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당사자는 물론 교련 선생에게 확인 할 수는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성일이 쏘아붙였던 군인이라는 말과, 대령이라는 계급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호석의 태도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발언 이후 호석이 전혀 딴사람이 돼 성일에게 어떤 위협적인 언사나 의자빼기 같은 장난도 걸어오지 않은 사실은 독자들도 기억할 것이다.

절대자가 죽은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총 세 발을 맞고 죽은 것은 이제 세상이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잘 못 알려진 것일 수도 있고 새롭게 알려져야 할 것은 얼마든지 많았으므로 방송과 신문은 늘 이 문제에 집중했다.

그런 어느 날 담임은 무슨 상담을 이유로 성일을 교무실로 불렀다. 시골에서 당한 교무실에 대한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성일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잘못한 것이 있는지 뒤돌아보고 만일 그것이 있다면 어떤 변명거리를 대야 할지 미리 생각해 두려고 했다. 그러나 딱히 책 잡힐 만한 것은 없었다.

그래도 그런 사태가 발생한 이상 죄송합니다, 를 반복하면서 파장을 줄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것은 겨우 10대 후반기로 접어드는 학생들이 경험으로 깨닫는 사실이다. 그래야 편하기보다는 그 자리를 조금이라도 더 일찍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선생들의 돌림 빵을 피할 수 없다. 지나가는 모든 선생들 앞에 얼굴이 찍히는 것은 물론 책 같은 것으로 머리를 세차게 맞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불려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나 불려갔다면 최대한 빨리 교무실을 벗어나야 한다.

피하고 싶은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갑작스런 변고가 나타나 그 일을 건너뛰었으면 하는 바람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전쟁이 나면 교무실에 가지 않아도 될까. 성일은 진짜로 그러기를 바랐다.

전쟁이 가져올 무시무시한 결과보다는 당장 자신 앞에 닥친 하찮은 것이 나에게는 더 소중하고 절실하다고 성일은 판단했다.

알다시피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성일은 이마가 반쯤 벗겨져 머리의 절반이 드러난 담임과 마주 앉지 않을 수 없었다.

최대한 공손한 표정으로 얼굴에는 금방 울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았을 때 담임은 아버지가 하는 일과 서울 누구의 집에 있는지 물었다.

자취라고 말하자 선생은 혼자 있느냐고 질문을 이어가면서 힐끗 성일을 쳐다봤다. 거짓말하면 단단히 혼날 줄 알라는 압력 같은 것이 눈에 어렸다.

거기에 할 일도 많은데 이런 귀찮은 일을 맡은 것에 대한 노기도 있었다. 담임이 빨리 일을 끝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대답도 짧고 간단하게 했다.

형과 함께 친척 할아버지 댁에 있습니다.

담임은 더 묻지 않았다. 대개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 온 아이들은 십중팔구 성일과 같은 스타일이었다. 친척 집이거나 자취 말고 달리 생각할 것이 없었고 그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담임은 예상했다는 듯이 무언가 쓱쓱 끼적이더니 나가도 좋다는 뜻으로 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할아버지가 뭘 하는지, 형은 학생인지 물었다면 조금 자세히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숙인 얼굴을 들지 않고 턱 짓으로 문 쪽을 한 번 더 가르켰다.

성일은 일어서면서 검은 커버가 있는 회색 종이에 무언가 열심히 적는데 열중하는 담임의 손을 보았다. 그 순간 담임은 입을 열고 가봐, 라고 말했다. 애들은 말로 해야 알아 듯는 듯이 말이다.

일어나서 나오려는데 교련 선생과 검사 아들이 칸막이 옆에서 쥬스를 먹고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왔는지 아니면 온 후에 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분명 교련 선생과 검사 아들이었다.

봐서는 안 될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성일은 얼른 고개를 돌렸는데 등을 지고 있던 선생은 자기 뒤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그 전학 간 놈, 아니 자퇴한 녀석에 대해 아버지가 무슨 말씀이 없으셨냐고 검사 아들에게 물었다.

그 순간 검사 아들과 눈이 살짝 마주쳤다. 그러나 그는 시골 촌놈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짧게 말했는데 앞의 말은 건너뛰고 빨갱이라는 소리만 귀에 쏙 들어왔다.

빨갱이라는 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귀에 대고 속삭인다고 해도 다른 말과 혼동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한 단어였다.

본능적으로 성일은 호석의 자퇴가 그것과 연관됐다는 확신을 가졌다. 간첩이라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했다. 권총이나 독침 같은 것이 연상됐으며 머리에 뿔이 달린 괴물이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는 것 같은 공포가 몰려 왔다.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는 호석의 존재를 말해야 할까. 그러나 성일은 그 생각을 접었다.

대신 나는 간첩에게 주먹을 날렸다는 생각이 온통 머리에 집중됐다. 성일은 덜컥 겁이 났다. 그 당시 겁이 없는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상황판단이 되자 갑자기 머릿속이 하얀 백지로 채워졌다.

쓰러질 것 같은 마음을 다잡고 성일은 제법 큰 소리로 가보겠습니다, 하고 일어서서 나가는 문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담임이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다시 적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성일은 교련 선생에게 불려가면 그래서 혹시 그런 것에 대해 물어보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고 거듭 다짐했다.

호석과 근처에 앉았으면서도 호석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해서 교련선생이 따귀를 날리지는 않을 것이다. 때린 다면 맞아야 하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더군다나 나는 호석과 친하지도 않았다. 싸우기까지 했다. 그 생각이 미치자 성일은 그것이 되레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먹다짐한 것은 반 아이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간첩과 친하다면 싸울 일이 없고 친하지 않은 것은 상을 받지는 못할망정 벌할 이유로는 합당하지 않다. 흠이 아닌 장점이고 용감한 행동이며 칭찬받을 일이다.

그리고 사실 성일은 호석에 대해 자신처럼 시골에서 전학 온 촌놈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고향이나 가족 관계는 물론 어디서 누구와 함께 사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을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안다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니까. 거짓말하지 말라는 교련 선생의 훈시에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성일은 조금 안심을 놓았다.

교무실의 문들 닫으면서 성일은 고개 숙인 담임 대신 교련 선생과 있는 검사 아들에게로 한 번더 눈을 돌렸다. 문은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닫았다.

문이 다 닫힐 즈음 그 자식 아버지가 여수에서 빨갱이 짓 하다가 지리산으로 도망갔다고 검사 아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일은 교무실 문을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조심하면서 다 닫았다. 빨갱이 자식이라고. 그것은 뒤가 올라가는 물음의 속삭임이었다.

그러자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퍼졌다. 절대자의 죽음과 빨갱이가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가. 빨갱이가 내려와 총이 아닌 독침을 날려 절대자가 죽었는가.

간첩들은 전에도 떼로 몰려와 총질을 하고 경찰을 죽였다. 밤도 아닌 대낮에 서울 복판에서 총을 쏘았다. ‘내레 북에서 왔수다’는 말은 너무 유명해 따라 하기도 했다.

쏘아 보는 눈빛이 머리에 뿔 세개 달린 괴물보다 더 잔혹했다. 그것이 간첩이고 빨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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