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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7-15 08:19 (월)
누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거실의 불은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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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거실의 불은 환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7.15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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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은 먼 곳으로 빙 돌아왔으나 고단한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몸은 아직 더 걷고 싶은 욕망에 들떠 있었다. 쉬기 위해 빈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한 곳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발짓은 또 다른 곳으로 이동을 명령했다. 마음이 따르는데로 따라가기로 성일은 결심했다.

한옥의 육중한 대문 앞에서 잠시 머물렀던 성일은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남의 집에 잘 못 들어온 것처럼 몸을 돌렸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언제나 귀를 세우고 있는 독일산 세퍼드가 짖을 것이다.

어서 들어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꼬리처럼 몸통을 흔들어 댄다. 세퍼드를 생각하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들어가서 좀 놀아주고 똥을 치우고 씻고 뭐 그런 일련의 정해진 행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일은 그것을 뒤로 미루고 싶었다. 게으른 사람이 숙제 미루듯이 하는 것과는 달랐다. 아직은 아니다.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애초 정한 목적지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또 다른 목적지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몇 발짝 걷다가 성일은 직진하지 않고 골목길을 통해 다시 대로로 나섰다.

그 거리에는 588과는 다른 구경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 둘 가로등에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다. 그 불빛 아래에 작은 등불이 바람에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촛불이 아닌 등불은 늘어선 가판대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비스듬히 서 있는 리어카 가판대와 흔들리는 등불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시골에서 쓰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등불에서 고향의 냄새나 흔적을 찾지는 않았다. 글을 쓰는 지금 순간 이런 풍경은 인도의 어느 지방이나 혹은 프랑스 노르망디 뒷골목의 사창가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두 곳은 가본 곳이 아니다. 경험이 없음에도 그런 것처럼 상상 속의 지역과 현재 풍경이 오버랩 됐다. 그만큼 분위기 자체가 이국적이라고나 할까. 물론 당시에는 비교할 거리는 물론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

가판대 중앙에 작은 등불이 켜지고 그것에 주변이 익숙해 질 무렵이면 오빠하고 나직히 불렀던 소리는 학생하고 부르는 또 다른 나직한 소리와 마주친다.

이번에는 젊은 아가씨가 아니고 늙수그레한 아줌마의 목소리다. 비슷한 또래의 아저씨도 학생하고 부른다. 어떤 아저씨는 하도 목소리가 간드러져 마치 여자인지 착각할 정도여서 가까이 갔을 때야 남자라는 것을 알 때도 있었다.

가판대의 주인들은 항상 나긋나긋했다. 588의 여자들이 간혹 기세를 올리는 것과 달리 그들은 언제나 조용히 말을 하곤 했다.

그리고 몸도 드러내지 않고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리어카로 사람이 다가오면 그림자로 나타나 홀로 있는 것은 리어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언제나 평온한 상태의 그들은 결코 화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그래봤자 이득이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아니면 그런 류를 취급하는 사람의 성품과도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적어도 그들은 책을 파는 사람들이었다. 머리에 무언가 많이 들지는 않았어도 인품만큼은 그에 합당한 대접이 따라야 했다.

과연 책 장수는 588의 웃음과는 달랐다. 서점 주인이 화를 내지 않듯이 잡지를 파는 그들 역시 언제나 작품을 쓰는 작가처럼 홀로 조용히 작업하고 있었다. 그녀들처럼 그들은 결코 따라오는 법이 없었다. 불러서 대답 없으면 그냥 내버려 둔다.

왜불러 하고 뒤돌아보는 사람이 있을 때 만 이리 와, 보라고 손짓할 뿐이다. 그들은 학교 선생님처럼 학생들을 상대하고 있었으나 선생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교련 선생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정반대의 비교대상으로 삼을만 했다. 교련 선생이 불현듯 등장한 것은 이런 구경이 칭찬받을 만한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중에 각인 시켰기 때문이다.

잘못이든 칭찬받을 일이든 그런 일이 일어나면 선생 중에서 유독 교련 선생의 모습이 따라다녔다. 등잔불 아래서 군복의 형상은 어른거리지 않았다.

아직은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행에 옮기지도 않은 일에는 그와 거리를 두는 것이 상책이다. 단지 구경만 한 것으로 빠따를 맞을 수 있지만 아직은 그런 단계는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은 없는지 두리번 거릴 필요도 없다. 다만 교모를 더 깊숙이 쓰기 위해 손으로 머리를 한 번 누르기는 했다.

아줌마는 성일이 오늘의 고객인지, 내일의 단골이 될지 순간적으로 판단했으나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어느 쪽인지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높은 교단이 아닌 낮은 보도에서 어린 학생들을 상대하는 아줌마는 코 묻은 돈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교련선생과 같았으나 공부 대신 사회를 알려 준다는 점에서는 달랐다.

그녀의 나긋함과 지나친 친절은 거리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저녁의 거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려 주었다.

자기 아들이라도 저렇게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전교 일등의 성적표를 들고 와도 그런 목소리를 흉내 낼 수는 없었다. 얼마나 정감이 가는지 눈을 그쪽으로 돌려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다.

머플러를 하고 퍼머한 머리를 길게 늘어 트려 제대로 얼굴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호감이 가는 형이다. 뱀의 여자와는 달랐다. 그녀는 눈이 컸고 이마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어둠이 막 내린 희미한 어둠 속에서 채비를 마친 그녀들은 학생하고 부를 준비를 하고 있다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아줌마는 어디선가 잽싸게 옆으로 다가와 좋은 만화책 있다고 보고 가라고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결코 잡고서 흥정하지 않는다.

이곳은 그러는 데가 아니라는 듯한 점잖음이 깔려 있었다. 인격적으로 상대가 대할 때는 어떤 경우라고 잠시 망설이게 된다. 그 틈을 이용해 아줌마는 천원이야, 하고 검지 손가락 하나만 위로 쳐든다.

겨우 천원이야, 뒷말이 따라붙을 때쯤이면 절반은 성공이다. 그래도 거래가 어렵다고 판단하면 들고 있는 책을 슬쩍 펼쳐 보이는데 흔들리는 등불 아래서도 그것이 어떤 형상인지 그 형상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숙이는 머리의 각도가 깊어지면 봐서는 안 될 무슨 귀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얼른 덮는다. 이래도 안 살래 하는 자신감이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 번득인다.

안 사면 바보가 된 기분이 들게 만드는데 학교에서는 물론 거리에서까지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다.

따귀 대신 내일 또 와 하는 대답을 듣는다면 그녀도 혹은 성일도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너무 빨리 책장을 덮는데 불만은 있다.

미리 펼치기로 작정한 페이지를 표시해 두었다가 얼굴 가까이 들이밀고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 밑장을 빼는 노련한 타자보다 더 빨리 책을 덮어 버린다.

그곳이 책의 핵심이지만 더 한 것은 다른 곳에 있다는 듯이 덮었다가 다시 다른 곳을 펼치면서 닫는데 그 짧은 시간에 다른 그림들이 성일의 머릿속에 화살처럼 와서 박혔다.

형사가 신분증을 용의자에게 내밀었다 빼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봤지, 내가 가진 책은 이 정도야. 그녀의 자부심이 빠른 손놀림에 묻어났다.

알아봤으면 잠자코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신상이 좋지 않겠느냐는 투다. 그 상황에서 맞는지 자세히 보자고 대드는 범인이 없듯이 좀 더 볼게요, 하고 말하는 학생은 없다.

천원이야. 아줌마는 한 번 더 가격을 말했다. 그리고는 안 사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먼지떨이를 들고 무언가를 털어내는 시늉을 한다.

이 정도까지 신경을 썼는데 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람과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미다. 더이상 입 아프게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돈이 없다는 말 대신 다음에 오겠다고 말하면 거만했던 아줌마는 잽싸게 만화책을 옆으로 밀고 그 아래에 있는 팬트하우스나, 허슬러 같은 도색잡지를 꺼내 들었다.

성이 안 차. 이거 찾는 거야.

그녀는 손가락 세 개를 재빠르게 펼쳐 보였는데 삼천 원이라는 뜻이었다. 오늘만 이 가격이고 내일이면 오천 원이라고 했다. 선심 쓴다는 표정이었다.

새침한 아줌마가 이쯤에서 물건을 팔고 싶다는 의사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학생, 이건 질이 달라. 다른데 없는 거야. 바꿔 줄 수도 있어. 내일 가져오면 천원을 돌려줄게.대신 찢으면 안 돼. 한 장이라도.

그녀는 사기로 결정이 났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뱉고는 누런 봉투에 책을 집어넣었다. 더 있을 수는 없다. 성일은 내일 올게요,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하고 자리를 뜬다. 리어카를 떠나 인파 속에 섞이면 비로소 후하는 길고 느린 한숨이 나온다.

아줌마는 성일의 뒷모습에서 내일은 아니어도 모레나 글피는 반드시 내 앞에 나타나 쭈뼛거릴 거라는 확신이 들었는지 다음에 봐 학생, 하는 말을 뒷등으로 날렸다.

기어이 사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녹아났다. 그날 성일은 미도파 앞에서 30분 정도 배회하다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면서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마장동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옆집 누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성일은 그녀의 발소리를 기다리지 않고 할머니 댁의 거실이 훤하게 켜진 있는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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