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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17:58 (금)
철책 근무의 자신감은 하루가 다르게 쌓여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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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책 근무의 자신감은 하루가 다르게 쌓여 가고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7.06 0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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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탄과 식스틴. 던지고 쏴라. 성구는 잔뜩 움츠리면서 이 말을 떠올렸다. 반복된 습관의 힘은 이런 것이다. 평소 교육은 이런 위급한 시기에 써먹기 위한 것이었다. 노망난 노인도 아닌데도 시도 때도 없이 던지고 쏘라는 말은 연습용 적이 아닌 실제 적이 왔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흘렀다. 한 겨울 계곡에서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온 몸이 한 바퀴 타고 돌았다. 그야말로 오싹한 기분이 발끝을 타고 머리 꼭대기로 올랐다.

안전핀에까지 손이 간 것이 불과 몇 초 전이다. 냉혈한 같은 차가운 금속성. 끝이 두 개로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는 기다란 뱀의 촉각. 어떤 것도 뚫고야 말겠다는 강인함.

성구는 던지고 쏘는 일을 해내기 전에 또 몇 초간 뜸을 들였다. 확실하지 못한 것을 한 번더 노려봤다. 그래 이번에도 그렇게 움직여라. 그 땐 가차 없다. 마치 적에게 경고라도 하듯이 성구는 속으로 다짐을 했다.

그런 다짐을 하면서 성구는 갑자기 그 긴 몸을 끌고 가면서 다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성구는 뱀을 생각했다.

지네처럼 여러 개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두 개 혹은 세 개 정도는 있어야지, 그래야 더 빨리 먹이를 낚아 챌 수 있다. 성구가 이런 생각을 이 순간 했는데 왜 그랬는지 그 자신도 모른다. 생각이라는 것은 때때로 아무데서나 끼어들기 때문이다.

뱀이라면 이럴  때 바로 공격을 할까. 아니면 좀 더 기다릴까.  흐릿한 시야 대신 풍겨오는 냄새가 후각을 파고 든다. 혀를 뻗어야 할까,  독을 날리며 이빨을 상대의 약한 부분에 꽂아 넣어야 할까.

아니면 좀 더 신중히, 적이 더 가까이 다가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숨어서 더 지켜볼까. 뱀이 되기로 했다. 적의 숨소리가 들릴 때까지 멈춰 있으라고 뱀의 눈이 말없이 지시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턱에까지 차올랐던 긴장의 끈이 경사진 곳에 뉘어진 실타래처럼 서서히 풀려나갔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고참을 발로 차지 않은 것이. 비상입니다. 소리치지 않은 것이. 또 한 번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없었던 것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애초 없었던 것이었다. 호들갑을 떨지 않은 것은 순전히 뱀 때문이었다. 조금 참은 것이, 순간의 유혹을 이겨낸 것이 이 얼마나 다행인가.

초소에 투입하는 첫날이었다. 성구는 열심히 검댕이를 찍어 발랐다. 더 진하게 이보다 진할 수는 없다는 각오로 얼굴을 검게 물들였다. 지금까지 이런 검댕이는 없었다. 이것은 위장인가, 아니면 과장인가.

성구는 그 어떤 것도 아닌 자신의 보호막이 검댕이라도 되는 듯이 열심히 발랐다. 심지어 목에 까지 발라 칠흑보다 더 검은 얼굴을 내보였다. 신병이라도 이렇게 까지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방탄조끼는 자신을 지켜 줄 수 없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숯검댕이 뿐이다.

얼마나 찍어 발랐는지 그것의 일부가 눈에 들어가 따끔거렸다. 그래도 아랑곳 않고 한 번 더 칠을 가져와 얼굴을 문질렀다. 한번 슬쩍 지나간 검은 자국의 고참과 비교해 보면 그는 아프리카 원주민보다 더 검었다. 너무 진해 되레 어둠을 숨기기보다 밝히는 존재였다. 초소장이 빛난다며 어깨를 툭 쳤다.

반사적으로 관등성명이 튀어 나왔다. 군기가 살아 있다. 그가 말하면서 사냥, 고래를 복창하게 했다. 오늘 밤 암구호였다. 짧고 강한 같은 소리의 여러 개 발음이 족구장 가운데 서 있는 그물을 향해 스파이크 보다 더 빠르게 빠져나갔다.

바짝 한 긴장으로 총구가 가볍게 떨렸다. 한 마리 잡자. 잡자. 짐승처럼 잡자. 연습용 표적이 아닌 실제 사람에게 쏴야 한다. 그것이 오늘 밤이 될지 모른다.

벼랑 끝에 선 대장 들쥐는 뒤따라 오는 동료 들쥐에 떠밀려 낭떠러지로 떨어질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동시에 떨어지면 그나마 공포감은 덜 할 것이다. 그래서 들쥐들은 집단 자살을 선택한다.

차라리 뱀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려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들쥐들은 뱀 앞에서 춤을 추지 않은 것을 떨어지면서 후회하고 있다. 그러나 후회는 항상 늦게 오는 법, 구름낀 밤하늘을 틈타 들쥐떼가 떨어진다. 아래로 아래로.

성구는 그날 밤이 오늘 밤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자 찔끔하고 오줌이 누수된 파이프 관에서 나오듯이 한 방울 흘러 나왔다. 첫 날의 철책 투입은 이런 기분이었다.

그만큼 고참들은 공포감을 심어 주었다. 사고는 언제나 첫날에 일어난다. 여기서 사고는 우리측의 오발이나 단순 실수 일 수 있고 적의 침투로 감시망이 뚫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좋은 의미가 있다면 그렇게 하는 적을 도중에서 멈추게 하는 것이다. 목을 확 꺾어서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다. 기분좋은 사고 말이다.

뭐든 처음에는 그런 것이라고 성구는 자위했다. 그러나 처음의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두 번 투입되고 나니 머릿속에 일정이라는 것이 확실히 잡혔다.

그리고 일주일만에 모든 것은 바뀌었다. 마치 1년은 근무한 것처럼 주변이 익숙해지고 새로움은 지겨운 것으로 변했다. 그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 몰랐을 뿐이다.

한 달이 지난 시점이다. 정신줄 놓지 말고 전방주시 잘해. 늘 하던 말을 고참은 되풀이했다. ‘오늘은 낌새가 이상해’ 그가 짧고 강하게 말을 맺었다.

긴장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런 날은 경험에서 나오는데 꼭 뭔가 터져. 나도 네 옆에 댓돌 위에 신발처럼 나란히 서야지. 고참은 그런 말을 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듯이 실제로 성구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나 오분도 안돼 고참은 철모를 바닥에 깔고 너부러져 앉았다. 고참은 원래 그런 것이다. 자기가 했던 말을 책임지지 않는다기보다는 금세 잊어 버린다.

그리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담배까지 피웠다. 놀랄 것이 많은 신병의 지오피 근무라지만 이것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냄새가 몇 킬로 가고 불빛은 그보다 배는 더 가니 휴대 금지 일호 품목이라고 늘 암구호처럼 외치던 것이 이곳 서너 평 참호에서는 너무 쉽게 무용지물이됐다.

낌새 운운은 내가 잔다고 해서 너까지 빠져서는 안 된다는 강한 경고말고는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걸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걸리면 그날은 재수 없는 날 정도가 아니다.

앉자마자 고참은 코를 골았다. 그도 신병처럼 늘 잠이 부족했다.

그러고 한 10분 쯤 지났을까. 앞서 말한 상황과 비슷한 움직임이 철망 사이로 어른거렸다. 바들바들 떠는 것이 있다면 성구의 처지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뱀과 눈이 마주친 가련한 한 마마리 들쥐.

성구는 고참을 깨우면서 적이 왔음을 알렸다. 지금이 던지고 쏴야 할 적기라고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지체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고참은 신병의 긴장에서 알아챘다. 반사적으로 일어난 고참은 그 시간이 0.5초도 걸리지 않았음을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잠겼던 눈은 그보다 더 일찍 떠졌고 상황파악은 그보다 더 빨랐다. 철모 깔고 자던 고참이 일어나서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도합 3초를 넘지 않았다. 그는 또 완벽을 기하기 위해 3초 정도 변하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자 철모를 벗고 냅다 성구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얼마나 쌧던지 철모 안의 두개골이 좌우로 흔들리고 전두엽이 순간적으로 찢어졌다. 어떻게 아느냐고. 정신을 아차 하고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맞는 것은 이력이 났지만 이번처럼 센 적은 없었다.

그리고 대개는 내리치는 사전 동작에 대비한 마음 가짐으로 충격을 어느 정도 흡수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말하자면 내리치기 위해 철모를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은 눈을 질끈 감을 수 있는 시간은 준다.

좀 더 친절한 고참이라면 들어 올렸다가 아무말 없이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개새끼 혹은 씹쌔기나 쫄따구 새끼가 감히 빠져, 하는 말을 한다. 이때는 말 없는 것보다 방어 시간이 길어 충격을 흡수할 대비 시간이 그만큼 길어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때리는 자나 맞는자나 전혀 그렇게 하겠다는 의심이 들만한 동작이 없었다. 전광석화처럼 내리치고 번개처럼 맞았을 뿐이다.

다시 고개를 숙인 고참이 근무 소홀의 벌로 너는 내려가서 죽었다고 한마디 했다. 그러나 고참은 그 말을 잊었는지 아니면 한 번의 엄포로 충분했다고 판단했는지 그도 아니면 성구가 내무반 상황에서 그것을 만회할 어떤 방법을 찾았는지 죽었다는 말을 대신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 성구는 짬밥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작대기가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에프 엠대로 철책 근무를 섰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습관처럼 몸에 뱄다.

모범이 있다면 성구에게 딱 어울렸다. 성구의 슬기로운 군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어는덧 시간은 흘러 삼중 철조망 너머로 초록이 깊어지면 나무에 달린 나뭇잎이 사람대신 정신줄을 놓았다.

간혹 바람을 타고 초소로 날아온 그것은 가을이 왔구나 하는 장탄식과 함께 내무반 전체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젊음은 그런 사소한 것에는 남의 일처럼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연의 흐름에 둔감한 젊음의 특권은 군대라고 해서 예외라기보다는 더 심했다. 정신과 육체가 155미리 대공포로 황폐화 된 표적지 주변처럼 그런 상태인데 낙엽이 지든, 그것이 지기 전에 붉게 물들어 간들 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렇지만 간혹 먼 산 불구경이 아닌 내 일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수도 있다.

전방 초소는 용산이나 명동이나 영등포나 하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인적 없는 산속 깊은 곳에 그런 지명을 들으면 민간인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불쑥 일어나곤 했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지 같은 말을 듣는다고 치자. 친구아닌 망나니를 만났어도 몸통까지 흔드는 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1소대나 2소대 같은 아라비아 숫자와 비교해 보라. 1소대 집합 혹은 용산 소대 투입.

나름대로 괜찮은 아이디어는 군대에서도 나왔고 형은 그런 군 생활에 착착 적응하고 있었다. 성구형은 영등포 소속 대원이었다.

영등포를 한 번 가본 적은 있지만 특별한 추억이 없었으므로 휴가 기간에 한 번 가보기 위해 일정을 짜기도 했다. 무료한 시간이 있다면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것이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가는 국방부 시계를 보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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