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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잔잔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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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잔잔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11.22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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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몇 초간 흘렀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무인도의 밤에 텐트 주위를 서성이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줘서 안 것이 아니라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텐트의 지퍼를 살짝 아래로 내려 킁 킁거리는 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위쪽이 아닌 아래쪽의 지퍼를 위로 살짝 들어 올렸다. 그랬더니 어떤 시커먼 발 같은 것이 지주막 근처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직감적으로 멧돼지인 것을 눈치챘다. 산에 있어야 할 멧돼지가 해안가로 내려온 것은 필시 먹이 때문일 것이다. 멧돼지에 대한 상식은 이것은 전부였다.

일단은 그것을 텐트 주위에서 될 수 있으면 멀리 쫓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소리를 지르거나 랜턴 불빛을 비추거나 아니면 문을 열고 나가서 힘으로 밀어제치는 방법이 떠올랐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화를 당할지도 몰랐다. 한참을 나는 긴장 속에서 보냈다. 그때 밖의 상황을 동료에게 핸드폰으로 문의해 보는 어떤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문제였다.

동료들은 지금 이 시간이면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자는 동료를 깨워서 이 상황을 물어 본든 뾰족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거는 대신 좀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때 무언가 텐트의 뒤쪽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돼지 특유의 꿀꿀거리는 소음과 냄새가 텐트 안으로 스며들었다. 돼지는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새끼까지 데리고 나온 대가족이 텐트 주위에서 무언가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곰처럼 죽은척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렇다고 라면 부스러기를 던져 주는 것도 해결책이 아니었다.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조심스럽게 등산화처럼 목이 긴 운동화를 신고 장갑고 무언가 잡았을 때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착용했다. 옷을 차려입고 여차하면 뛰쳐나갈 작정을 하고 있었다.

손전등도 끈으로 묶어 허리춤에 매달았다. 이 모든 과정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됐기 때문에 밖에 있는 멧돼지들이 눈치채지는 못했다.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편히 앉았고 이윽고 옆으로 쓰러졌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곧 나는 잠이 들었고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이었다. 시계를 보니 5시였다.

계절은 아직 여름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먼바다에서는 여명이 비쳐들기 시작했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여느 때처럼 하루일과를 생각했다. 오늘은 쓰레기 대봉투 30개 정도는 채울 수 있겠다는 다짐했다. 그렇게 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 텐트에서 빠져나오려고 할 때 나는 문득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급제동하듯이 몸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밖의 동향을 살폈다.

그리고 지퍼를 좌우로 내렸다. 밀려갔던 썰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텐트에서 비록 수십미터 후방이었지만 물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바람은 어제처럼 잔잔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주변은 멧돼지 자국들로 분주했다. 무수한 그것들은 한두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주변에서 맴돌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혹시나 녀석들이 멀리 가지 않고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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