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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순례자의 엄숙한 그림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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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엄숙한 그림자를 보았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5.09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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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의 골짜기가 메워지고 새로운 산이 생겨난다. 그는 그런 생각에 진저리를 쳤다. 지금 오르고 있는 이 산의 저 깊은 골짜기가 쓰레기로 채워진다.

그날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었다. 남편은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오직 절대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절대자와 만나는 것에 사활을 걸었다.

공룡능선의 어깨쯤에 다다르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는 잠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몸을 사방으로 돌려 서로 달리 보이는 풍경을 감상했다.

그리고 산이 아니 쓰레기의 구조물을 상상했다. 네모산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산은 위로 갈수록 뾰족해야 했다. 그것이 산의 연상이다. 그런데 건물의 사작형처럼 처음과 끝이 네모난 산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더 많은 쓰레기를 더 효과적으로 쌓기 위해서는 네모가 필수적이었다. 인공물도 좀 그럴듯하게 지었으면 싶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몸을 한 번 떨었다.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겨났을 때 모양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을 수 없을 때는 기왕이면 좀 더 나은 디자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하지만 절대자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전처럼 불쑥 손을 내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어디에도 존재했다. 미국의 어느 곳에 있는지 아니면 신흥사의 절마당을 거닐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남편은 반드시 만난다는 확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절박한 심정인데 선을 생각하고 모든 아름다운 것을 찬양하는 절대자가 모른 척하고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내려논 배낭에서 집에서 타온 커피 한 잔을 스테인리스 컵에 따랐다. 배낭 뒤에서 딸랑거리며 따라왔던 잔이 이제야 제 몫을 하는 순간이었다.

커피는 뜨겁지는 않았지만 보온병 속에서 나름대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검은 물이 목구멍을 타고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몸에  열이 올랐다. 쉬고 있는 동안 식었던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긴장했던 몸이 이완됐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딱히 정상을 올라가서 바로 하산해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비박을 해도 문제가 없었다. 정상은 그저 가는 길에 있는 하나의 길목에 불과했다. 그대로 하산해도 됐다.

등산의 목적은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서두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미국의 아내가 지금 이순간 한국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세 달 후라는 막연한 시간만 기억하면서 아내를 만나면 어디서 무엇을 먹고 어떤 곳을 갈지 조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먹는 것과 가는 곳에 대해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다.

먹자는 것을 먹고 가자는 것을 가면 됐다. 먹고, 가는 것은 서로 헤어져 있던 시기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었지 그것이 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절대자를 만나서 했던 일과 절대자를 만나기 위해 설악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할 참이었다. 그것에 대해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하면서 그는 극적인 어떤 것이 일어나기만을 바랬다.

한편으로는 쓰레기를 치우는 동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해변의 어느 곳을 쉬지 않고 거니는 그들은 어떤 숭고한 존재처럼 보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가면서 고행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례자의 엄숙한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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