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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6:37 (금)
박물관의 기둥으로 쓰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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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기둥으로 쓰면 좋을 것이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4.23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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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를 주고받은 그들은 엘에이로 향했다. 그녀는 리처드에게 남은 일정을 계속하라고 했으나 그는 그러지 않고 그녀와 동행했다.

부담을 주기 싫은 그녀는 자신의 변덕 때문에 일정이 바뀐 것에 대해 미안해했으며 따로 떨어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시작을 같이했으니 마무리도 그렇게 해야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녀도 더는 반대하지 않아 두 사람은 곧바로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그 무렵은 한국의 남편은 설악산의 어느 지점을 향해 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겉옷을 벗어 배낭에 메고 편한 반 팔 티셔츠 차림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그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딱히 정상까지 간다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발걸음은 쉬지 않았다. 가면서 그는 자연을 둘러 보고 나무는 만졌다. 큰 나무 아래에서는 아예 배낭을 내려놓고 팔을 돌려 그 크기를 재보기도 했다.

어림없을 줄 알면서도 손이 맞닿는지 확인해 본 것은 본능적이었다. 나무는 그가 사랑하는 자연가운데 으뜸이었다. 태어난 곳에서 이사 한 번 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사는 나무야말로 대단한 존재였다.

꿋꿋함의 상징이었다. 남편의 아버지가 그랬다. 아직 정정하지만 93세의 나이가 걱정스러웠다. 남편의 아버지, 그러니까 그녀의 시아버지는 태어난 곳에서 단 한 번 도 이사를 하지 않았다.

초가집을 현대식으로 고쳐 지은 것이 전부였다. 그 자리 그 위치에 집만 새롭게 지은 것이어서 이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무와 남편의 아버지가 같은 생을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무의 생명은 거의 무한대였다. 인간의 삶이 고작 100년인 것을 감안하면 이 나무는 앞으로 수 백년을 더 살지도 몰랐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한 그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갑자기 존귀함을 느꼈고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경외심 같은 것이 온몸을 파고드는 것을 알았다.

나무 아래에 서면 그는 언제나 이런 감정에 사로잡혔다. 큰 나무에서 그는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금강송의 일종이라 막 떠오른 해를 받은 나무의 표피는 붉은 색인 것 같기도 하고 금빛 칠을 한 옷감 같기도 했다.

이 나무가 생명이 다하면 곧게 뻗은 줄기는 집을 짓는데 사용됐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느 돈 많은 개인을 위한 집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찾고 즐겨 보는 박문관 같은 곳의 중심 기둥으로 썼으면 좋을 것이다.

이마의 땀이 사라지자 시원하기도 하고 조금 쌀쌀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런 몸의 상태는 감기가 찾아오기 십상이어서 옷을 꺼내 입고 보온을 하든지 아니면 체온을 스스로 끌어 올리기 위해 멈췄던 길을 다시 떠나야 한다.

그는 일어섰다. 옷을 입으면 곧 벗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길을 떠났다. 나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악수하고 헤어질 때는 어떤 야릇한 감정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무는 계속해서 나타났다. 아까 보았던 나무보다 작은 것이 많았지만 그와 비슷하거나 더 큰 것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나무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다른 것들도 살펴 보았다. 풀도 있고 잡초도 있고 작은 꽃들도 있었다.

돌도 있었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계곡 속에 작은 폭포도 숨어 있었다. 천상의 화원에서 각자가 행복의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새들이 날개짓을 할 때는 갑자기 온 세상이 녀석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철푸덕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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