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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어가고 주변은 날이 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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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어가고 주변은 날이 새지 않았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4.12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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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장소 역시 로비는 비슷했다. 숱한 도박 기계들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끝이 보이지 않는 로비를 가득 채웠다.

기계들은 마치 수조 속의 물고기처럼 살아서 펄떡거렸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모이를 주는 것으로 착각해 고개를 내밀고 어서 달라고 아우성쳤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치고 올라왔고 그래서 피하지 않으면 옷이 젖기 일쑤였다. 두 사람은 더 젖기 전에 나란히 기계 앞에 앉아 앞서 하던 것을 계속했다.

계속이라고 했지만 코인은 금새 바닥났다. 리처드는 그녀를 보았고 그녀도 그를 보았다. 둘은 웃고 있었으나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리처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제지하고 그녀는 '운빨'이라면 자신있 다고 이번에는 내가 동전을 바꿔 보겠다고 했다.

사실 그녀는 신세 지는 것을 싫어했다. 리처드가 삼백 불을 교환했으므로 그녀도 같은 금액을 바꿨다. 그리고 둘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말을 하지 않았어도 서로 다짐했다.

과연 운이 있었다. 다 떨어질 무렵 잭 팟은 아니더라도 리처드의 그림자 셋이 요란한 굉음 소리를 내며 합쳐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 하면서 몰려들었다. 어떤 이는 박수를 쳤고 또 어떤 이는 둘러서서 춤을 추기도 했다.

오백 달러였다. 그들은 딴 돈은 환전하기 위해 남겨두고 남은 코인을 다 썼다. 지금은 땄지만 더 하면 딴 돈은 딴 것이 아니라 기계의 것이 될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기분도 냈고 오백 달러도 있었으므로 그들은 기분 좋게 거리로 나왔다. 밤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으나 화려한 조명이 해를 대신했다.

거리는 북적였고 행인들은 들떠 있었다. 그녀는 인파 속에서 세라를 보았다. 짧은 가죽 치마를 입은 그녀가 먹잇감인 남자를 노리면서 유유히 걷고 있는 그런 모습의 여자들이 사방에 있었다.

그들이 모두 세라는 아니었으나 그 중에 누군가는 세라일지도 몰랐고 실제로 그럴 수 있었다. 그러자 그녀 가슴은 조금 먹먹해져 왔다.

벤은 또 어디에 있을까. 근사한 식당에서 자리를 잡자 그녀는 리처드에게 피기스 감독이 만든 <라스베이가스를 떠나며>를 언급했다.

리처드는 그 영화를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보지는 못했다고 솔질히 말했다. 그녀가 조금 망설이자 그는 영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녀는 벤과 세라 이야기를 했다. 벤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으러 이 곳에 오는 과정에서부터 영화의 결말까지 이야기 하자 그녀는 조금 숙연해 졌고 그런 기분을 받은 그 역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차안에서 그가 노래를 부르고 몸을 흔들 때 술병을 들고 라디오 볼룸을 높였던 리콜라스 케이즈의 모습이 연상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몸을 흠칫 떨었다.

‘걱정 말아요. 당신은 벤이 아니잖아요.’

그녀가 이렇게 위로했으나 리처드는 불행한 영화의 결말과 내내 음습했을 그 과정이 상상이 되는지 좀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둘은 이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을, 진정한 사랑을 했으므로 불행하지 않고 행복했노라고 말했다.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한 번 뿐인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수 있다는 부연 설명을 듣고 서야 리처드는 기분전환이 됐는지 자신은 결코 벤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며 웃었다.

그녀는 자신도 세라의 삶와 인생을 존중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인생이라고 잘라 말했다. 세라를 연기했던 엘리자베스 슈가 생각나는지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둘은 붉은색의 포도주 잔을 기울였다. 밤은 깊어가고 주변은 날이 새지 않았다. 이 곳의 세계에는 시계가 없었다. 굳이 시계를 볼 필요도 없었다. 세상과 단절된 이곳에서 시간은 필요없는 사치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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