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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딴 세상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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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딴 세상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2.19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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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는 지금 그것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위로와 안정과 따스함은 병실에서 더 중요한 것이었다. 이제 완치된 그는 그녀를 다른 방식으로 존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연인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리처드는 아직 그러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의중을 알 수 없었고 그런 기대가 자칫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가 남편이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을 안 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현실과 직면했을 때 리처드는 괴로웠다. 하지만 곧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속마음을 알리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병실에서와 마찬가지로 태연했다. 아니 더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범접하기 어려운 성자와 같은 그 무엇이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리처드는 성급하기보다는  오는 기회를 보고 있었다.

과연 남녀의 사랑이 그녀에게도 가능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따져 물었던 것이다. 이는 리처드가 현명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녀에게 남녀의 사랑은 이미 식은 상태였다. 식었다기 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다. 한국에는 또 엄연한 남편이 있었으므로 그녀의 도덕 관념에 비추어 볼 때 두 명의 남자를 두는 것은 용서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녀의 지금 관심사는 봉사였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는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는 아낌없는 봉사 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할 때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신이 주신 천부의 재능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지구를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켰던 속죄로부터 벗어 나는 길도 그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 이국의 땅에서 도저히 가망이 없는 환자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일을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라니. 그녀는 그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무려 3년간 휴식도 없이 병실에서 생활했던 것은 그녀가 가진 이런 부채의식도 한몫을 했다. 병원은 그녀의 건강과 그녀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휴식을 위해 여러 차례 휴가를 제의했으나 그 때마다 그녀는 번번히 거절했다.

심지어 어떤 때는 휴일 근무도 자처했으며 동료가 일이 있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도 쉬지 않고 병동에 나왔다. 그녀는 병실에서 평온했으며 삶의 활력을 느꼈다.

죽어가는 환자의 싸늘히 식은 손을 잡았을 때 그녀는 죽음에서 삶을 보았다.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면서 그녀는 앞이 아닌 뒤를 봤고 자신이 아닌 타인을 보았다.

그녀는 창문을 닫았다. 갑자기 차 안이 온화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들려오던 소음이 사라지자 마치 딴 세상으로 진입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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