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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대비행을 하던 기러기떼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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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대비행을 하던 기러기떼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2.01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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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노벨상을 받은 그 학교 출신 동상 앞에 서 있을 때 그녀는 다시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고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는 잎을 숙이고 마침 불어오는 바람은 그것을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트렸다.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굴러가는 나뭇잎을 보고 웃는 것은 그녀만의 특기였다. 그녀는 사물의 조그만 변화에도 얼굴을 활짝 폈다. 얼굴은 웃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늘 웃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이 좋다고 칭찬했다. 리처드는 약속시간 보다 조금 늦었다. 그가 멀리서 달려왔다. 아니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가 획 지나쳤을 때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있어 지나간 것이 백인인지 흑인인지 황인종인지 알지 못했다. 여기서 그녀는 인종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캠퍼스는 그야말로 인종 전시장 같았다. 백인이 좀 많은 것 같기도 했으나 꼭 그런 것 만도 아니었고 흑인이나 황인종도 그에 못지않게 많았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학생으로 묶여 있었다. 모자를 벗었을 때 리처드는 그녀 만큼이나 활짝 웃고 있었다. 학업에 지친 표정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다가 서로 붙어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로 좁혀지자 그들은 거리만큼이나 더 가깝게 느껴졌다.

오대호 주변의 한 벤치에 앉았을 때 그녀는 행복하다고 느꼈다. 석양이 잔물결 위로 막 기울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었으나 춥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습관적으로 코트의 깃을 귀 뒤로 올렸다.

그는 그런 그녀를 위해 자신의 옷을 벗어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의 손길이 다정했고 따뜻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겨도 좋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했다.

그가 다가왔을 때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했고 그녀는 아직 이르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그것은 형식적이었다. 달리 다른 대답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알았어라고 대답하는 것은 좀 진부했다. 그녀는 그의 제의를 덥석 받아들이는 대신 그를 걱정하는 모습을 먼저 보였다. 분위기에 취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진심이었다.

서울로 전화를 건 그는 그녀가 들으라는 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결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어머니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굳이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두 모자가 이산상봉 하는 것처럼 편하게 대화하라고 그녀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기숙사 밖은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오가는 학생들의 발걸음은 뚝 그쳤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 떼가 편대 비행을 하면서 어디론가 날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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