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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감각만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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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감각만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였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6.07 0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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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것은 중사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대놓고 싸우기를 좋아했다. 이처럼 은밀하고 숨죽이는 대결은 적성에 맞지 않을뿐더러 그가 좋아하는 방식도 아니었다.

그는 굴 만 나가면 적들을 일시에 다 섬멸할 것 같은 분노로 몸을 떨면서 이을 악물었다.

그는 대원들이 따라 오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자신이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망설이지 않고 나아갔다. 적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비록 자신들이 판 굴속에서 지리에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중사의 부대가 얼마나 많이 투입됐는지 어떤 무기를 갖고 있는지 지원군이 대기하고 있는지 알 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싸움에서는 먼저 보고 먼저 공격하는 것이 임자다. 중사는 겁에 질린 적들이 자신들을 발견하고도 머뭇거리면서 공격이 늦춰지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은 적들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유리한 것은 그들은 앞을 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중사는 짐짓 여유를 부렸다. 자신이 몸을 돌리기만 하면 서로 마주 보게 되는 것이다. 적도 그렇지만 자신도 앞을 보고 있다면 적이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뒤에서 공격해 오면 자신은 물론 대원들도 살아나가지 못한다. 중사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적이 뒤에서 공격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왼손으로 벽을 더듬고 오른손으로 식스틴을 거머쥔 채 왔던 길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앞으로 서둘러 옮겼다. 잘 왔다고 생각했으나 갑자기 굽은 길이 나타났던 것이다. 한 번 왼쪽으로 꺾었기 때문에 이제는 곧은길이 이어져야 맞았다.

그의 머릿속은 인간 네비게이션처럼 움직였으나 이 순간 방향을 잃고 잠시 멈춰 섰다. 그는 순간적으로 불빛을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손에 든 후레쉬의 스위치를 위로 밀어 올리려고 엄지에 힘을 줬다.

하지만 곧 여기서 손전등을 껴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고개를 가로 저었다. 후레시 불빛은 내가 적을 비출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연출 할 것이다. 마주 보는 상태와는 딴판으로 적과 자신의 위치가 완전히 역전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

달아나면서 적이 아닌 반대편을 비추는 불빛은 독안에 든 쥐처럼 살아서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등을 표적으로 내주는 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중사는 다급한 와중에서도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적이 턱 밑까지 쫓아왔다는 신호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멈춰 서서 들어보니 발자국 소리도 달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은근하면서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한 발 씩 등 뒤에서 따라올 뿐이다.

간헐적으로 멈추었다가 다시 이동하는 소리가 작은 숨소리처럼 굴속을 휘저었다. 적들은 표범처럼 잔뜩 등을 구부리고 눈을 크게 뜨고 사슴에게 달려들 결정적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중사는 그런 낌새를 등 뒤로 느꼈다.

동굴의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땀과 함께 흘러내렸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순전히 감각만으로 방향을 잡고 쉬지 않고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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