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5-03 06:44 (금)
53. 서늘한 바람만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상태바
53. 서늘한 바람만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6.05 14: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적들의 숨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방금 먹은 국수 찌꺼기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국물에 고수를 넣었는지 풀잎의 향내가 깊은 어둠속에서 진동했다.

매운 고추도 먹었던 모양이다. 중사는 매운 맛을 생각하자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틀림없이 적들은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대검이 등을 찔러 허파를 관통하는 모습이 그려졌고 식은땀이 물길을 찾은 관정처럼 솟아났다. 적들은 예리해서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던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들은 칼을 잘 다뤘다.

긴 칼이든 단도이든 칼날은 언제나 벼려져 있었고 그 것은 총보다 먼저 살인무기로 사용됐다. 단번에 죽지 않고 적이 내려다보는 데서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은 원통한 일이었다. 전쟁에서 죽음은 순식간에 일어나야 했다.

길게 시간을 끄는 것은 적이나 아군이나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부상은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더욱 가중시켜 생명을 구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젊은 병사의 그런 것은 전쟁이 아무리 비열하다 해도 바랄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 실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중사는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이런저런 생각할 것도 없이 단박에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수록 중사의 머릿속에는 살아나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가득 차올랐다. 이런 기분은 군인이 된 이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총알이 날아오르고 허벅지를 관통하고 폭탄의 파열음에 귀를 머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태어남은 자신이 결정하지 못했으나 죽음만큼은 스스로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총알이 한 번에 심장을 관통하는 것이 칼이 목에 들어오는 것보다 덜 잔인했다. 만약 적에게 무언가를 부탁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한 번에, 단 한 번에 끝내 달라고. 중사는 자신이 포로로 잡혀 길고 긴 고문 끝에 겨우 정신을 차려서 한 첫말이 이 말이기를 기대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중사는 죽음과 포로와 고문 등으로 정신이 어지러웠다. 지상이었다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강한 것을 가지고 정신을 조정해 왔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쫒기는 입장이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상황이 달라졌다기보다는 깊은 굴속이 마치 마약과 같은 어떤 약물 작용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중사가 이렇게 까지 코너로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둠과 쫓김과 빠져 나가야 한다는 절박감이 어우러져 그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더구나 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조차 알 길이 없었으며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증거도 없었다. 다만 본능만이 등골이 서늘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