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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황색의 비가 내렸고 꽃들은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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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황색의 비가 내렸고 꽃들은 시들었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5.21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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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를 건널 때 잉어가 꼬리를 쳤다. 흙에 기댄 몸에서 파문이 일면서 살짝 드러난 몸통이 황금색이다. 누런 빛깔은 머리 쪽보다는 아랫 쪽에서 두드러졌다.

잉어가 산란을 위해 이곳까지 올라왔다. 새끼를 낳기 위한 몸부림은 순간이지만 몸짓은 날카롭다.

멈춰 서서 잠깐 들여다보자 부끄러운 듯이 한 번 더 요동을 치더니 좀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숨긴다.

그 뒤를 날 센 녀석이 따라가 붙는데 그 순간 또 한 번 물보라가 인다. 싸우는 기세가 대단한데 얼 핏 보면 승천하는 이무기 못지않다.

아쉬움을 달래며 샛길로 접어든다. 흰색 불빛을 쏘면서 자전거가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안장에 납작 엎드린 폼이 경험 많은 레이서다. 부럽지 않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천천히 달려 나가는 자의 여유다.

처음부터 숨이 가빠온다. 속도를 더 늦추니 천천히 걷는 걸음 수준이다. 그러자 가로등 불빛 아래 노랗게 핀 유채꽃이 보인다. 꼬리치는 잉어처럼 흔들린다.

오월은 꽃과 함께 온다. 천변의 빈 곳에는 온갖 꽃들이 흐드러졌다. 잡초에서부터 일부러 심어놓은 것까지 저마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먼저 피기 위해 다툰다. 어떤 것은 그러나 손톱만한 피를 흘리기도 한다. 붉은 꽃은 이렇게 핀다.

하지만 정글의 숲은 느긋하다. 오늘 피지 못하면 내일 피면되니 다툴 이유가 없다. 전투가 없는 날은 꽃을 보면서 세월을 보냈다. 고국의 꽃보다 크고 더 화려한 꽃들은 위안을 준다.

고개를 숙이고 보고 있으면 예쁜 것에서 향기가 난다. 어떤 것은 커도 냄새가 없지만 어떤 것은 작아도 심한 향기를 뿜어냈다.

녀석들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다. 한결 같은 미소를 보낸다. 차별하지 않고 똑같다. 총알도 피하고 수류탄도 피하고 부비트랩도 비켜간다. 꽃들은 제 수명을 다한다. 조준사격에도 끄덕없다.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에서 가련한 것의 당당함이 숨어 있다. 그러나 내리는 황색비에는 속수무책이다.

그것을 한 번 맞고 나면 금세 시들어 진다. 살아 있던 것이 금세 죽는다. 냄새도 없어지고 꽃잎도 말라 버린다. 몸통도 시꺼멓게 썩는데 순식간이다. 꽃을 죽이는 황색비는 그 전에는 정글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꽃을 죽여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 말은 삽시간에 퍼져 높은 분은 당장 그렇게 하라고 비행기를 하늘 높이 띄었다. 그 전쟁은 꽃을 죽여야 이기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꽃이 죽자 주변의 초록들은 모두 갈색이 됐다. 갈색은 작은 바람에도 무너져 내렸다. 정글은 모습을 드러냈고 위장복은 숨을 곳을 찾기 위해 허둥댔다.

땅을 파고 더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집중 사격을 피할 수 없었다. 베트콩들은 속살을 드러낸 정글에 미로와 같은 동굴을 팠다. 천년 전에 만들어진 자연 동굴보다 더 깊고 더 정교 했다.

들어간 곳은 있는데 나오는 곳을 찾을 수 없어 수색을 나갔던 대원들은 길을 잃고 공포에 빠졌다. 속은 깊어 빛은 차단됐다.

후레쉬 약이 떨어지면 그들은 숨죽이고 몸을 떨었다. 전투식량이 바닥이 나면 그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부짖고 남아 있는 실탄을 어둠속에 쏘면서 울려오는 소리로 위안을 삼았다.

그러다가 굶주려 쓰러져 죽었다. 죽기 전에 그들의 영혼은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그 곳은 너무 멀었고 동굴은 너무 깊었다.

동굴의 주인들은 냄새에 능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시체를 찾아서는 채 식은 않은 몸에서 총과 남아 있는 무기들을 빼내고 옷을 벗겨서는 그 곳을 더 파고 보이지 않게 시체를 덮었다.

나간 대원이 돌아오지 않자 밖에 있던 소대장은 중사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물었다.

그는 자신에게 3명을 딸려 달라고 말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대원들을 끌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첫 대원이 굴속에 들어 간지 한 달 후였다.

이번에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여분의 후레쉬 약을 충분히 지참했으며 방향이 꺾일 때마다 표식을 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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