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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관절은 직각으로 꺾이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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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관절은 직각으로 꺾이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4.1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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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반에 있던 소대원들은 나고의 신음 속에서 위안을 찾고 있었다. 내 머리가 아닌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무의식적으로 이인도 손을 머리로 가져가 튀어나온 곳을 만졌다.

부끄러웠던지 얼른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시늉을 하면서 이인은 들었던 손을 황급히 거뒀다. 속 깊은 곳이 달아올랐지만 그 뿐이었다.

옆에 있는 바납 뚜껑으로 머리를 맞은 나고는 땅콩 모양의 흉터를 이마의 반쪽에 남겼다.

막사에서 나고의 슬픈 영혼은 휴식처를 찾지 못했다. 체념이 담긴 표정이 얼굴 전체에 핏물처럼 번져갔다. 그의 영혼이 지내기에 이곳은 너무 허술했다.

타격할 때 빛나던 김상병의 눈은 일체의 가식도 없었다. 이 순간에 그는 완벽한 인간이었다. 이마를 찍고 나서 그는 나고의 주변을 돌았다.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간격이 일정했다.

소중한 존재라도 되는 듯이 나고를 천천히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나고의 옆구리를 질렀다. 이번에도 그의 눈은 순수했으며 무언가를 간절히 이루기를 바라는 듯 정열로 가득했다.

고요하게 돌다가 소리쳐 내지르는  대립성이 서늘했다. 서늘한 그 공기가 막사를 감싸고돌았다. 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오면서 피가 눈으로 들어갔는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 시절은 길었다. 남은 기간은 혹독했고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질긴 겨울이 지나고 막사에도 봄이 왔다.

계획대로 나고의 부대는 전방으로 이동했다. 훼바에서 지오피 근무를 위해 그의 연대는 민통선 안쪽의 얕은 야산을 여러 개 넘었다.

육중한 철문이 가로막힌 통문 앞에서 나고는 개인화기를 점검하고 북쪽으로 나 있는 매복지로 향했다. 새로운 환경에 나고는 그런대로 적응했다. 밤새 근무를 서면 낮에는 취침하는 뒤바뀐 일상이 그런대로 참을 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무기였다. 15발 탄알을 가득채운 탄창이 주는 느낌은 빈총을 잡았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허리에 찬 탄띠가 묵직할수록 여유가 생겼다. 비록 상자 안에 들어있지만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수류탄의 존재는 만족 그 자체였다.

실탄과 수류탄이 옆에 있을 때 나고는 자유를 느꼈다. 심란할 때 편안했으며 힘 들 때 위안이 됐다.

철조망의 식별표시를 확인할 때면 군인이 체질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말뚝을 박아도 좋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지오피 생활을 하면서 나고는 피어났다. 순찰로 주변의 작은 꽃처럼.

작아도 꽃은 쉽게 눈에 띄었다. 보라색이 흔했고 노란색도 있었다. 1980년 4월이었다.

휴가도 멀지 않았다. 나고는 군대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며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림을 그려줬다.

어떤 때는 하루가 정말 빨리 갔다. 자고 일어나면 근무요, 근무에서 돌아오면 달콤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날은 금방 제대를 명받을 것 같았고 너무 빠른 제대가 오히려 아쉬울 정도였다.

이인이 긴 코스로 방향을 잡았을 때 다리위에 어김없이 세 개의 그림자가 따라 붙었다. 그림자는 앞서기도 했으며 나란히 섰다가 뒤로 처지기도 했다.

세 방향에서 형태를 달리하는 그림자를 보는 재미를 느끼면서 이인은 다리를 통과했다. 다 넘고 나서 손을 털듯이 몸을 가볍게 풀어 주자 몸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관절들은 직각으로 꺾이지 않고 적당한 예각을 유지하면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신명난 몸통은 앞을 향해 시원하게 나아갔다. 뿌듯함이 몰려왔다.

관할 지역이 바뀌면서 안내 문구도 달라졌다. 천변의 오른쪽에서 잉어떼가 몸부림쳤다. 산란을 위해 짝짓기를 벌이는 잉어들은 요란했다. 어떤 때는 몸을 뒤집어 물 밖으로 튀어 올랐다. 여러 마리가 그렇게 할 때는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착, 착 죽이 맞았다.

그 소리에 뒤질세라 박수 소리도 컸다. 앞서가는 늙은 남자는 좌우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짝 하는 소리를 냈고 뒤로 동시로 뻗으면서 역시 짝 하는 소리를 냈다. 습관이 됐는지 짝, 짝 하는 소리가 짝짓기 하는 잉어처럼 그럴싸했다. 그 늙은 남자는 둘이 아닌 홀로 그 짓을 하며 걷고 있다.

닿기라도 하면 몹쓸 병에라도 걸릴 듯이 이인은 멀찍이 자전거 길로 나와 앞지른다. 한동안 짝,짝 소리가 나서 귀를 닫고 싶다.

‘꽃씨 파종지, 들어가지 마시오.’

광목천에 붓글씨가 아닌 컴퓨터 잉크로 찍혀 나온 활자는 들어가면 혼쭐이라도 낼 듯이 명령체였다.

에이 포 용지에 비닐로 코팅된 경고문은 10미터 간격으로 박혀 있어 애써 보지 않으려는 사람까지 보게 만들었다.

그러라고 해도 들어갈 사람이 없을 흙바닥을 보호한다고 금지의 말을 적어 놓는 심보가 이인은 부러웠다. 운동하기 위해 차려 입은 사람들의 운동화는 흙보다 깨끗했다. 이쪽에서 공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다.

부대는 봄맞이 단장을 했다. 속옷을 가리기 위한 관물대에 색을 입혔다. 나고는 색을 잘 골랐다. 그가 판대기에 그림을 그리면 그 위에 이인은 시를 썼다. 말이 시이지 시 같지 않은 잡 글 이었지만 소대원들은 그림과 시가 그려진 자신의 판 앞에서 성숙해졌다.

소대평가에서 나고의 소대가 우승한 것은 그가 그린 그림 때문이었다. 그는 곧잘 불려나가 엽서에 또 다른 그림을 그렸다. 김일수 상병은 병장으로 진급했다.

작대기 네 개를 단 그는 의젓하기보다는 음흉해졌다. 그는 틈나는 대로 나고를 부렸다. 종이쪽지를 주며 한 쪽에 그림을 그리게 했다. 나고는 총 든 그를 그렸고 빈 공간은 이인이 끄적거린 시가 채웠다.

그 즈음 김 병장은 후임을 졸라 어떤 여자의 주소를 알아낸 뒤 매일 엽서를 보냈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한 달 후 한꺼번에 반송된 편지가 무더기로 김병장에게 돌아왔다. 소대장은 꾸러미를 주면서 웃었다.

그는 뒷머리를 긁으며 마주 웃었으나 소대장이 가고나자 축구화 끈을 조인다음 후임병을 발로 찼다. 그리고 나고에게 편지 뭉치를 내던졌다. 이후로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려 달래거나 시를 써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나고는 다시 고문관이 신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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