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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21. 마디가 있는 뼈처럼 나무기둥 흔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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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마디가 있는 뼈처럼 나무기둥 흔들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4.04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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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결과에 이인은 잠시 당황했다. 겨우 두 번 뿐이었지만 절대자의 행동은 이번에는 달랐다.

첫 번째는 그냥 알았다고 알아듣게 말로 했었다. 사람의 말과 다름없는 말이었고 억양도 서울 표준말을 쓰고 있어 듣고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너무 쉽게 청을 들어줘 의심하는 마음이 안 생길 리 없었지만 귀로 들리는 소리까지 믿지 않으면 이것은 사람이 절대자에게 취할 도리가 아니었으므로 이인은 믿었고 믿었으므로 그는 지하 백화점에서 커피를 다 먹은 후 밖으로 나왔다.

왕복 8차선 도로를 30분 넘게 지켜보는 이인의 눈은 차라이 오토바이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대명천지에 그것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천지개벽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속하겠다고 말한 절대자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믿었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어쩌자고 절대자는 이인도 정신 나간 행동이라고 어이없어 하는 그런 약속을 그렇게도 쉽게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 시간 동안 이륜차는 단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기다리고 지켜보자.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또 그만큼 지나갔다.

그래도 양팔을 앞으로 뻗고 운전대를 잡은 이상한 사람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손을 내리고 다른 한 손에 흰 철가방을 든 중국집 배달원의 그림자도 안 보였다.

그 때 중요한 내용을 속보로 알려주는 기능이 탑재된 핸드폰의 진동음이 심하게 울렸다.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이인은 화들짝 놀랐다.

‘오토바이가 한 대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것이 속보의 제목이었다. 절대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알았어, 라고 말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인간은 물론 자연까지 지배하는 초월적인 절대자의 힘 앞에 나는 무력했다. 그래서 독립만세를 부르듯이 두 손을 쭉펴서 하늘 높이 뻗었다. 그리고 새 신을 신지 않았음에도 그런 것처럼 폴착폴착 뛰어 올랐다.

그러면서 눈길은 자연스럽게 다시 도로로 향했다. 무언가 일이 벌어진 것만은 틀림없는데도 도로는 멀쩡했다. 차량들은 가득했고 신호등도 정상으로 작동됐다. 여의도 방향으로 밀리는 것도 여전했다.

‘알았어, 기다려.’

단 한마디로 이인의 부탁은 그렇게 해결됐다.

스티로폼을 없애 달라고 두 번 째 부탁을 한 것은 내가 달리기 시작한지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늘 그것이 눈에 거슬렸다. 맥이 풀리고 늘어지려고 할 때 그것은 하얀 유령처럼 천변을 따라 흘렀거나 공터의 한 곳에서 죽은 시체처럼 널 부러져 있었다.

이인은 다시 절대자를 찾았다. 그는 처음처럼 소리 없이 왔고 또다시 무엇을 해 달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 것 때문에 불평하지 않았다.

하늘 아래에서 하얀 것이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시쳇말로 차고 넘쳤다. 사람의 의중을 꿰뚫었으므로 이인이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자 절대자는 겨우 체엣, 체엣 하는 콧김 빠지는 소리로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인은 알았어, 라는 첫 번째처럼 쉬운 대답을 원했으나 엉뚱한 주문이 떨어졌다.

‘눈을 감으시오.’

이것이 절대자의 두 번째 명령이었다. 이번에는 반말 대신 조금 존대하는 말투였으므로 이인은 공손하게 손을 앞으로 모았다. 예절에는 예절로 맞대응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던가.

그리고 하라는 대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사람의 손같은 것이 온기를 품은 채 이인의 이마위에 멈췄다. 그러자 곧 검은 바탕에 흰 빛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눈을 더 꼭 감자 이번에는 흰빛이 바탕을 차지하고 검은 색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잘 소지된 M16을 총구에서 격실 쪽으로 바라본 모습과 흡사했다. 더 세게 눈꺼풀을 꺽자 격발 장치가 있는 방아쇠 쪽으로 다가갈수록 검은 색은 완전히 사라지고 세상이 온통 흰색으로 변했다.

그 순간 이인의 몸은 백년 묵은 시골 고향의 평나무 앞에 섰다. 어리 둥절 할 새도 없이 커다란 나무가 흔들렸는데 그 기운 때문에 이인은 멈칫 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나무는 잎이나 줄기가 아닌 몸통을 움직였는데 마치 마디로 연결된 뼈가 있는 것처럼 좌우로 혹은 위아래로 곡선을 그렸다.

오래된 나무의 몸통은 어른 두 세 명이 팔을 둘러도 모자랄 정도로 큰 것이어서 그것이 흔들릴 때는 땅도 같이 춤을 췄다. 삼지 그래픽을 보는 듯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티로폼은 영원히 사라졌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속보를 알리는 진동음이 바지 주머니 속의 핸드폰에서 울려 나왔다.

이번에는 '스티로폼이 모두 사라졌다'는 제목이 붙었다.

오토바이가 사라지고 스티로폼이 없어 졌음에도 세상은 아무 일 없이 평온했다. 하루 이틀 지나자 그 많던 것들이 다 어딜 갔느냐고 시끌벅적거리던 여론도 금세 조용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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