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을 위해 복용한 한약이 부작용을 일으킨 사례가 속출하자, 정부에서 한의원 조제한약에 대한 대대적 관리 방침을 발표했다. 정부의 발표에 의사단체들은 이번에야 말로 분명하게 표준화, 과학화 된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최근 서울고등법원은 환자 A씨와 가족들이 한약재 제조사 두 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고들은 원고들에게 2억 10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
지난 2011년 9월경 딸을 출산한 A씨는 산후조리를 위해 남편인 한의사 B씨가 한약국에 한약처방전을 보내 제조한 한약제제를 복용하고 만성신부전 진단을 받았다. 만성 신부전으로 입원한 A씨는 기존 신장을 제거하지 않은 채 뇌사자의 신장을 이식받는 수술을 받았다.
이후 A씨와 가족들은 한약재 제조사들이 독성물질이 함유된 한약재를 제조했다면서 소송을 제기했고 1, 2심 재판부는 모두 A씨와 가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이 사건 한약재는 제조물책임의 대상이 되는 결함 있는 제조물에 해당하고, 제조사들은 한약재의 결함으로 인한 손해가 발생한 경우 손해배상 책임을 부담해야한다”고 판시했다.
한약을 먹고 만성신부전증을 앓게 된 케이스는 이번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15부에서 한약을 먹고 만성신부전증을 앓게 된 C씨가 한의사와 가맹업체 대표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1억 96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의료계, 한약재 대한 안전성 검증 주장
한약을 복용한 후 부작용이 발생하는 등 의료사고가 속출하자 의료계에서는 정부의 철저한 한약 관리, 안전성 검사 등을 촉구하고 나선 상태다.
한약 복용 후 만성신부전증을 앓게 된 환자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자 대한의사협회 추무진 회장은 “이번 한약 부작용에 대한 배상 판결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며 “한약제제에 대해 임상시험과 독성시험을 의무화할 것을 촉구했다”고 밝힌 바 있다.
추 회장은 “의약품에 대해서는 여러자기 안전성 검증절차를 통해 부작용을 최소화하지만 안약재는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며 “원외탕전실에 어떤 한약 원료가 납품이 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한약재로 만들어지는지, 한역제제 성분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에 대해 전혀 알 길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한약을 먹고 신장이 망가지는 환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한약 임상시험과 독성검사 의무화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며 “행정당국의 적절한 원외탕전실 관리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한방항암제 사건으로 유명한 충북대병원 소화기내과 한정호 교수도 최근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의료정보포럼에서 기존 한약서 임상시험 면제 제도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하고 이를 검증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을 촉구했다.
한 교수는 “정부는 지난 2002년, 2008년 ‘기성 한의서’를 ‘기존 한약서’로 명칭을 바꾸고 4만여개의 처방이 수록된 동의보감과 본초강목 등 10종의 한방고서를 정했다”며 “기존 한약사 10종에 기재된 한약재를 이용, 한의사가 전통 한방원리에 의해 사용하는 것에 대해 ‘안정성과 유효성에 대한 현대적 검증’을 면제해 줬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한의사에게만 이러한 특권을 주는 것이 부족했는지 제약회사까지 10종 한약서에 기재된 처방 그대로 만들면 안전성과 유효성에 관한 심사를 면제해주도록 했다”며 “더 나아가 ‘천면물 신약’ 중 자료제출 의약품에 해당하는 제제의 품목허가 과정에서 한방고서의 추출법이나 한방의료기관에서 임상적으로 사용하던 제품 등에 대해 독성시험 자료를 면제해 줬다”고 전했다.
문제는 동의보감조차 상당수 내용은 중국의 황제내경을 인용하고 있는데, 황제내경은 기원 전 중국 청동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 한국에서는 안전성과 유효성이 면제된 한약·한약제제는 중국의 2000년 전 지식·과학을 현대에 그대로 정부가 인정, 대향 생산해 국민에게 투약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 교수는 “재료와 처방이 고서에 나왔고 수백년간 사용돼 왔으니 안전하다는 믿음을 갖는 것 자체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위 주장”이라며 “동의보감에 따르면 수은은 탈모와 피부 부스럼의 치료제이며, 각종 동물의 대변이 치료제로 등장한다. 90년대 초, 여러 한약재로 만들어진 다이어트약이 유럽에서 유행하고 만성신부전 환자가 늘어나자 한약재의 아리스톨로킥산 성분이 신독성, 신장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사용이 금지됐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한정호 교수는 “민족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객관적인 검증을 면제해 주는 것은 조상의 이름을 팔아 자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며 정부가 한약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여러 동식물과 광물이 섞여 수백 가지의 성분이 혼재된 한약의 유해성과 그 위험을 감수하고 비용을 지불할 효능이 있는지 일반인이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라며 “결국 이에 대한 검증은 국가의 책무로, 하루 빨리 정부 부처는 제약회사와 한방병원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한약제제에 대한 안전성과 효과를 검증하고 국민들에게 모두 공개해 안심하고 한약을 복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탕약 현대화 시범사업 실시
이 처럼 한약이 환자에게 오히려 독이 된 사례가 속출하자 정부가 한의원 조제한약 품질 개선 대책을 발표했다.
보건복지부(장관 정진엽)는 국민들이 자주 복용하는 조제한약(탕약)을 의약품 수준으로 안전하게 조제·관리할 수 있도록 향후 4년간(2017∼2020년) ‘탕약 현대화 시범사업’을 실시한다고 17일 밝혔다.
복지부는 탕약을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 제조 의약품과 동일한 수준으로 안전하게 조제·관리할 수 있도록 ▲표준조제설비 ▲표준제조공정 ▲임상시험기준 등을 마련한 후, 이를 토대로 시범사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구체적으로는 2018년까지 경남 양산시에 위치한 부산대학교 한방병원에 탕약표준조제시설을 구축하고, GMP급 표준조제공정을 마련한 후 2019∼2020년에 이용을 원하는 한방의료기관(약 100∼200개소)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실시한다.
또한, 탕약표준조제시설에서 조제한 탕약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빅데이터로 구축·활용하기 위한 한약표준화정보시스템을 한약진흥재단에 구축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약 2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올해 안에는 탕약에 대한 임상연구기준 및 임상연구방안을 마련하고, 임상시험용 약(위약)도 개발해 탕약의 안전성·유효성 검증과 관련한 임상연구도 단계적으로 진행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시범사업을 실시한 후 한의계와 공동으로 그 결과를 분석해 제도 개선, 표준조제시설 추가 구축 등을 포함한 본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탕약시설에 대한 검증대를 마련하자, 의료계에서는 제대로 된 과학화 과정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의견이 빗발쳤다.
그동안 꾸준하게 한약의 안전성·유효성 검증 의무화를 요구해온 과학중심의학연구원은 “복지부가 한약 검증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현대의약품과 동등한 수준의 검증 절차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 대해 원칙적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의협 김주현 기획이사겸대변인은 “한의원에서 조제하는 한약과 관련해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며 “특히 현대화 되어있지 않은 탕약 관리 부분에서 현대화, 과학화, 표준화 돼야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의협의 입장”이라고 전했다.
김 대변인은 “비방이란 이름으로 개인이 탕약을 제조했을 때 발생하는 사건들처럼 표준화되지 않는다면 제 2, 3의 사건이 벌어질 것이 자명하다”며 “복지부가 하루라도 빨리 국민 건강을 위해서라도 나서서 보다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