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뉴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가 이념을 정립하지 못해 의료 영리화가 시작됐고, 결국 의사윤리까지 실종됐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원장 안덕선)는 26일 의협회관에서 ‘의료개혁의 시작, 무엇부터 할 것인가?’를 주제로 의료정책 좌담회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건강복지정책연구원 이규식 원장은 ‘한국은 건강보험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국가인가’라는 발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먼저 이 원장은 건강보험제도를 만들면서 의료의 이념정립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 도입된 시기는 1977년으로, 1976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이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저소득층에게 의료혜택을 주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보건사회부는 1977년 1월 의료보호와 의료보험을 동시에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의료보험은 6개월 후 실시하도록 하고, 1976년 12월 ‘의료보험법’을 전면 개정했다.
그러나 사회의료보험을 실시하기로 결정한 이후 불과 1년 만에 도입하다보니, 의료보장제도의 이념이나 의료제도에 미칠 영향 등을 따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이 원장의 지적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의료제도 확립에 집중하면서 의료보험제도는 자연히 시혜적 관점의 복지제도로 간주됐다”며 “이에 따라 유럽의 건강보험국가와 같은 '의료가 기본' 이념을 정립할 시간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나라가 벤치마킹한 일본의 경우, 건강보험의료는 원가로 생산하되 비급여를 급여와 동시에 제공하는 혼합진료는 안된다는 등의 건강보험 운영원리를 철저히 지켰다”며 “우리나라는 건강보험 통합 과정에서 일본식 제도를 배제하려는 국수주의적 발상이 내포돼, 의료가 영리화되는 길이 열리게 됐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 "의료는 기본권이라는 이념을 설정하지 못한 가운데, 비급여로 의료가 영리화되면서 의사의 윤리가 실종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결과적으로 의사는 수익이 좋은 곳으로 집중해 소아과나 산부인과 같은 전문과에는 전공의가 지원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는 지적이다.
반면, 일본은 인구 1000명 당 의사 수가 우리나라와 거의 같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비정상적 현상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하나의 예를 들면, 일본 정부는 의료산업화를 위한 방안의 하나로 2004년 8월 규제개혁회의에서 의료서비스 산업화를 위해 ‘혼합진료를 전면 허용해야한다’고 제안했지만, 이를 일본의사회가 반대해 혼합진료에 제동이 걸렸는데, 일본 의사회는 의료를 교육과 같은 공공제로 믿고 있어 의료가 이윤 획득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며 "일본 의사회와 같이 의사윤리가 확고할 때 건강보험제도를 발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특히 “건강보험의료에서 영리를 취해선 안된다는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며 “건보 통합 후, 비급여를 허용하고 가격 설정을 의료기관에 맡기면서 의료의 영리화를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의ㆍ정 갈등으로 인한 현재의 혼란은 비급여를 통한 영리화가 원인이지만, 엉뚱하게 의사수 부족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는 쓴소리다.
이 원장은 “건보통합 후 우리나라의 모형은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로, 요양기관에서 비급여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이라며 “비급여서비스는 계약제를 통해 비계약의료기관에서 제공하는 것이 의료보장국가의 원칙”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는 정부 사업을 위해 의료기관을 강제 징발하는 조치로 전시나 재난발생과 같은 단기간 허용은 가능하다"면서 “공공의료기관은 강제 징발해도 무방하지만, 민간의료기관은 재산권 침해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민간의료기관을 당연 지정하고, 공공의료기관과 차별하는 모순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좌담회에 참석한 패널들도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를 두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고려의대 예방의학교실 윤석준 교수는 “대한민국 의료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의식으로, 공급자나 소비자 모두 비용의식이 불분명하다”며 “그로 인해 양쪽에서 도덕적 해이가 일어나고 있고,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의료비가 급속도록 성장하는 배경”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사회보험제도를 운영하는 나라 중 우리나라만큼 의료비가 빨리 증가하는 나라도 없다”며 “보험자가 비용의식을 어떻게 고취시킬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 없기에 이런 혼란이 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더해 “국민들에게 비용의식이 없는 데다, 사회 속에서 신뢰라는 자산이 없다보니, 폭발적으로 의료이용이 늘어났다”며 “비용의식을 공급자, 소비자에게 고취하는 노력을 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해야한다”고 제언했다.
의협 이은혜 정책이사는 “현재 우리나라는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처럼 건강보험제도도 만들어지기보단 주어진 것으로, 이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모두 변화해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특히 “의료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보험의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를 설정하는 것”이라며 “현재 건강보험은 사회보험의 원칙을 무시하고 있는데, 국민이라는 다수의 입장으로 소수자인 공급자를 착취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의료개혁의 올바른 방향은 요양기관 계약제 전환”이라며 “국민에게도 공급자에게도 선택권을 허용하는 요양기관 계약제로 전환해야 건보재정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