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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2:11 (금)
391. 화양연화(2000)-너희와는 다른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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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화양연화(2000)-너희와는 다른 우리?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2.04.03 1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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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인연이 되기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 그러기 전에 꼭 스쳐 지나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영화적 장치에서는 그런 장면이 나오면 좋다. 아직 관객들은 눈치채기 전이다. 속이는 재미는 감독에게 즐거움을 준다. 나중에 눈치채고는 놀라운 장면이라는 칭찬은 덤이다.

단 한 번 마주쳤을 수도 있고 두세 번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마주침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연으로 이어진다.

비로소 영화적 완성도는 높아지고 관객은 감독의 의도에 점점 빨려 들어간다. 94년에 나온 <중경삼림>은 임청하와 금성무가 생판 모르는 남들이 하듯이 그냥 그렇게 스쳐 지나간다.

97년에 나온 <접속> 역시 전도연과 한석규가 서로를 알기 전에 마주치면서 관객들에게 이들 사이가 어떻게 발전될지 호기심을 이끄는데 성공했다. 스쳐 간 만남은 결국 인연으로 이어졌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서도 인연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천부인(장만옥)과 차우(양조위)는 같은 날 이사한다. 계단을 두고 이삿짐과 인부가 엉클어지고 천부인과 차우가 상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선다. 이는 처음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질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스칠 때 마다 슬쩍슬쩍 보여주는 남녀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그들은 운명적으로 첫 만남에서 내 여자 내 남자로 낙인찍었다.

그런데 문제는 둘 다 결혼해 각자 짝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들 인연이 불륜이 되는 과정은 그렇지 않은 상대에 비해 훨씬 힘들고 험난하다. 그런데 이런 난관을 극복해 주는 것은 공간이다.

앞서 계단을 언급했다. 계단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마주 오는 누군가에게 비켜주기 위해서는 몸을 세로로 세워야 한다. 그래도 몸이 스친다. 옷자락을 감아쥐어도 소용없다.

남의 집 현관문과 내 집 사이는 화면에서 보아도 거의 붙어 있다 시피 한다. 만나면 이웃사촌이라고 웃으면 인사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문을 나서면 공동 부엌이 있고 마작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출근길은 물론 몇 시에 퇴근하는지도 빠삭하다. 옛날 옆집의 숟가락 숫자까지 알아맞추는 우리네 살림살이와 하나도 다른 게 없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이 좁은 공간에서 시도 때도 없이 천부인과 차우는 마주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남편이 맨 넥타이와 차우의 것이 같은 것을 천부인은 알아챈다.

차우도 자신의 부인이 들고 다니는 핸드백과 천부인의 것이 똑같은 것에 의문을 품는다. 공교롭게도 천부인의 남편은 일본으로 출장을 갔고 차우의 부인 역시 집을 비운 상태다.

이 정도 상황이라면 천부인과 차우가 인연으로 맺어진다고 한들 관객들은 도덕적 처벌을 내리라고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 너희들도 그런데 왜 우리에게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따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둘은 만남을 이어간다. 그러면서 사랑의 감정이 깊어진다. 하지만 쉽지 않다. 곡절이 가로막는다. 그러나 사랑이 그것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여기서 부터는 불륜이 아닌 로맨스다. 감독의 관객에 대한 배려다.

▲ 장만옥이 기대반 두려움 반으로 양조위를 쳐다보고 있다.
▲ 장만옥이 기대반 두려움 반으로 양조위를 쳐다보고 있다.

남녀는 감독의 의도와 관객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정신과 육체에 어울리는 그야말로 멋진 ‘화양연화’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때 천부인의 남편이나 차우의 부인은 방해꾼이 아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뒷모습 혹은 간혹 들리는 목소리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려 줄 따름이다.

그러니 천부인과 차우의 사랑은 눈치 볼 것이 없다. 하지만 계단을 통과해야 하고 마작을 두는 이웃의 눈을 피해야 하는 것은 두 사람의 숙명이다. 남에게 입방앗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할 연인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 한 켠에는 떳떳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발정 난 고양이처럼 비명은 지르되 발소리는 죽이며 살금살금 걸어 다닌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하필 불륜의 시기라니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국가: 홍콩

감독: 왕가위

출연: 장만옥, 양조위

평점:

: 불륜 남녀는 다른 불륜 남녀에게 너희들과 우리는 다르다고 말한다. 당연히 다르다. 포장지가 그들이 비해 월등히 예쁘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면발이 주는 효과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는 시절이다. 그러나 겉포장은 달라도 내용물은 똑같다.

그러니 주인공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면 내로남불이 확실하다. 그러나 관객은 깜박 속아 넘어간다. 상대가 먼저 저질렀고 두 남녀가 보아서 아름답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옳고 다른 이들의 사랑은 그르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아니다. 순서의 차이일 뿐이다. 너희가 먼저 했으니 우리가 나중에 한 것은 정당하다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불륜에 있어 선후 관계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근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미있게 봤다면 그것으로 관객은 본전을 뽑는다. 영화관에 갔다가 밑지지 않았다면 그런 영화는 비판보다 칭찬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

묻어 둔 비밀을 언제 꺼내 볼까 상상해보는 재미도 크다. 그것이 세상에 나올 때 헤어졌던 남녀는 또다시 화양연화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는 이의를 달 수 없다. 각본 좋고 연기 뛰어나고 영상 화려하고 음악은 재능을 뺏어 오고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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