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4 18:59 (수)
384.데어 윌비 블러드(2007)-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신
상태바
384.데어 윌비 블러드(2007)-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신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12.12 11: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흘러야 할 것이 젖과 꿀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 세상에서는 그런 기대할 것 애당초에 없다. 낭자한 피와 복수와 질투만이 넘칠 뿐이다.

서두가 우울하니 결론은 아니기를 바란다. 그런데 마무리는 더하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데어 윌비 블러드>는 말 그대로 젖과 꿀 대신 검은 피가 흐른다.

여기서 피는 사람의 붉은 피가 될 것이며 땅속에 있는 검은 진주 석유도 될 것인데 붉든 검든 피인 이상 거기 등장하는 주인공은 필시 피를 볼 것이다. 과연 영화에는 피 장면이 난무한다.

플레인 뷰(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광산 노동자로 성장했다. 막장에서 괭이 들고 금이든 다이아몬드든 뭐든 반짝이는 것을 깬다. 그러나 벌이가 수월치 않다. 그래서 유전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옆에는 아직 어린 아들이 있다. ( 이 아이는 사고로 죽은 동료의 자식인데 사업상 이득을 위해 친아들처럼 키운다.)

19세기 말 캘리포니아가 배경이다. 그 시대 그 지역에 관한 책과 소설이 많은 것처럼 영화 소재로도 당시는 더할 나위 좋은 시간이다. 돈이 몰려다니고 성공과 실패가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뷰도 그런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대개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나 성공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뷰도 그런 공식, 할리우드 공식을 차질없이 따른다.

아버지와 아들에 이어 종교가 끼어든다. 가족과 종교는 미국을 움직이는 힘이 아니던가.

여기 등장하는 목사는 애송이다. 목사를 애송이라고 한 것은 그가 성심이 약하거나 교리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청춘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도에 대한, 교회 부흥에 대한 열정은 끓는 피보다 진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어른 뺨 여러 대치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공력의 소유자다. 이미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뷰에게 어느 날 그가( 폴 다노) 찾아온다. 석유 매장이 풍부한 지역을 알고 있으니 돈을 주면 정보를 주겠다는 것.

순진한 얼굴과는 달리 목사는 대단한 사업 수완을 가졌다. 뷰와 밀고 당기는 질문과 대답 끝에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는 그 돈으로 멋진 교회를 짓고 뷰는 헐값에 사들인 땅에 석유가 쏟아지면서 거부의 대열에 오른다.

언론도 석유 재벌 뷰를 다룰 정도다. 돈을 쓸어 모으는 과정에 앞서 말한 온갖 불행이 찾아온다. 아들은 공사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청력을 상실한다.

아버지는 말한다.

‘나의 목소리가 들리느냐.’

아들은 대답한다.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계약할 때나 큰 결정 때 늘 껌딱지처럼 곁에 있던 아들은 농아 학교를 가기 위해 멀리 떠났다. (사업상 이득이 될 게 없다고 판단해 버렸다고 볼 수도 있다.)

뷰는 아들이 사라진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 사업을 더 늘리려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땅을 사야 한다.

목사가 키를 쥐고 있다. 무신론자인 그는 돈을 위해 교를 믿고 죄를 실토하고 그 과정에서 신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사에게 여러 차례 뺨을 얻어맞는다.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하느님을 찬송하는 치욕으로 죽을 지경이다.

▲ 주인공이 단상으로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따귀를 맞는 모욕을 견디는 것은 신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돈때문이다.
▲ 주인공이 단상으로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따귀를 맞는 모욕을 견디는 것은 신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돈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쯤 사업가 뷰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고통은 잠시고 돈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른다. 어느 날 목사는 사라졌다.

그리고 배다른 형제라는 이상한 사람이 뷰를 찾아온다. 그 형제는 뷰에 의해 살해되고 그는 검은 땅속에 쥐도 새도 모르고 묻힌다. 형제의 살해는 긁어모으는 돈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기가 불편한 뷰에게 이번에는 떠났던 목사가 불쑥 나타난다. 그는 파산했다. 허튼수작의 결과였다. 목사는 제의한다.

‘멕시코에서 교회 사업하자.’

뷰에게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10만 달러를 미끼로 마구 때린다. 볼링공으로 짓이긴다. 그것도 모자라 신을 부정하는 말을 하라고 다그친다.

예수는 미신이다, 외치는 목사는 뷰가 그랬던 것처럼 신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형제님을 남발하는 자의 순간 모면 행위일 뿐이다. 뷰가 모욕을 참는 것처럼 목사도 똑같이 견딘다.

목사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의 부정과 예언의 불신은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보기 힘든 역겨운 장면이다. 그러나 그 장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번 되풀이 된다.

정말로 신은 없다는 거듭된 외침은 일시적인 만행이 아니라 평소 신념이 그렇다는 것을 믿게끔 하는 끔찍한 모습에 관객들은 경악한다. 종교 역시 사업과 마찬가지로 돈 앞에는 하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댓가로 목사는 원하는 것을 얻었을까. 신을 부정하는 것만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세상의 목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숫자가 그 대열에 참여할 것인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영화가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미국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출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 폴 다노

평점:

: 여기까지 온 독자라면 아들의 행방이 궁금할 것이다. 혈육은 아니지만 아들로 키운 자식과 늙은 재벌 아버지가 만나는지, 만난다면 어떤 식으로 정리될 것인지.

파트너로 함께 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이 사업을 물려받을 것인지 이제 장성한 아들이 통역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대면했다.

수화를 모르는 아버지는 듣지 못하는 아들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아버지의 표정은 일그러진다. 아들은 이전의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의 잔혹함을 다 봤다는 듯이 그래서 아버지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듯이 시종일관 공격적이다. 차마 통역이 옮기지 못하는 저주의 단어가 나오고 아버지의 얼굴은 정유되지 않은 석유처럼 아주 흑빛이다.

아버지도 지지 않고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사막에 버려진 고아라고 고함친다. 친부가 아니라니 다행이다, 라는 말을 관객이 굳이 들어야 하나 의문이 들 만큼 둘의 대화는 잔인하다.

가난한 자가 역경을 딛고 돈을 벌었으나 그 인생의 최후는 해피하지 않다. 금 깨다 석유 깼던 광부의 꿈은 믿음과 구원, 희망과 미래 대신 불신과 탐욕, 좌절과 살인으로 점철됐기 때문이다.

영화는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관객들의 발걸음은 무겁다. 과연 인생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사는 인생이 바람직한 인생인지 돈과 인생 그리고 종교는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주기 때문이다.

한편 배경음악은 공포감을 노골적으로 조장한다. 실제보다도 매우 과격해서 뒤에 나오는 끔찍한 장면이 되레 희석될 지경이다. 황무지와 사막의 풍경은 저런 곳에서 좀 쉬었으면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