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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는 봉사로!” 필요한 곳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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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는 봉사로!” 필요한 곳 어디든
  • 의약뉴스
  • 승인 2006.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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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의대 김동수 소아과 교수
연구실적뿐만 아니라 국내외에서 왕성한 의료 봉사 활동으로 지난 해 11월과 12월에 세계의사회가 선정하는 ‘세계 참된 의사’와‘제4회 한미 의료인상’을 받은 연세대 의대 소아과 김동수(53)교수.

그의 인생 항로는 대학 때부터 참여한 의료봉사 활동 때부터 시작한다.

“놀랐고 무서웠죠. 눈썹이 없고, 손발은 닳아져 버렸어요. 머리털을 잘라서 눈썹에 심는데 그게 앞으로 꼿꼿이 자라거든요. 음성으로 전환된 부모를 둔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어요.”

본과 1학년이었던 73년도에 전북 김제의 나환자 촌으로 나갔던 의료 봉사 때 충격을 받았다. 그 시절에는 음성으로 판정된 사람들이 원주, 용인 등지에서 정착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정착촌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병원에 가면 사람들이 싫어했기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의료 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고 난 뒤에 의료 봉사에 대한 사명감은 확고해졌다. 그 이후 용인 등으로 토요일마다 봉사를 나갔다.

강원도 인제의 현리에서 군 생활 할 때도 그의 열정은 이어졌다.

“102 야전 병원에서 소아과장으로 있으면서 밤에는 현리 근방의 아이들을 돌보았어요. 강원도 현리면 정말 외진 곳이라 병원을 찾기가 쉽지 않았지요. 상사한테서, “김대위는 현리의 슈바이쳐여!” 라는 말도 들었답니다.”

89년 부터는 모교인 연세대에서 지도 교수로서 학생들과 함께 일년에 2회씩 격오지 의료 봉사를 나가고 있다.

98년 부터는 해외 의료 봉사에도 눈길을 돌렸다. 우리 나라는 건강국민보험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격오지에도 의료 시설이 갖추어졌지만 중앙 아시아와 동남아 쪽은 도움이 많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98년부터 현재까지 의료 낙후지역이거나 지진, 전쟁 등의 재난을 겪은 베트남, 몽골, 터키, 우즈베키스탄, 이라크 등 12개국에 나갔다.

“우즈베키스탄의 의료 시설은 매우 열악해요. 중앙 아시아 쪽이 90년 대 초반에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긴 했지만 아직도 공산주의 시절 의료 기법을 따르는 실정입니다. 뇌에 물이 차는 뇌수종에는 머리에 관을 넣어서 물을 빼내야 하는데 이뇨제(利尿製)만 먹이는 거예요. 간염 치료한다고 스테로이드를 과다 처방해 부작용이 수시로 나타났고요”

이런 우즈베키스탄에 도움을 주기 위해 궤도를 교재로 쓰는 형편을 보고 귀국 후에 미국간염학회에서 발간한 교재(‘레드북’)을 열권 복사해 부쳐 주었다. 또, 이 나라 의사를 3개월 간 세브란스 병원에 초청해 교육을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작년 초에는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은 인도네시아 반다아체에 의료 봉사를 갔는데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덥기도 하고 또 가난하기도 해서 얇은 판자집을 짓고 살아요. 그런데 그 집이 물에 휩쓸리면서 사람들의 몸을 마구 할퀸 거예요. 사방에서는 썩는 냄새가 나고, 벽에는 시체가 걸려있고요.”

미국은 ‘종료’를 선포했지만 게릴라전이 이어졌던 2003년 5월 말에 이라크 바그다드에 갔을 때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제가 단장으로서 세브란스 병원팀 6명을 데리고 갔는데, 조명탄이 터지고 헬기가 공중에서 차를 폭격하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렸어요. 단장으로서 대원들에게 ‘창가에는 가지도 마라, 안에서 자라!’고 당부했지요”

한번 죽는 거 사지에서 봉사하다가 죽으면,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후회가 없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이라크를 넘어서, 인접국인 요르단에 도착했을 때는 ‘이제 살았다!’고 안도했다.

과연 무엇이 그를 참혹한 광경과 죽음의 위협을 마다하지 않고 봉사의 현장에 있게 한 것일까.

“크리스찬으로서의 신앙이 근본 바탕입니다. ‘봉사는 봉사로’라는 성경 구절이 있듯이 인정받거나 상은 저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의사라는 직업이 하늘이 된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학생들에게도 강조하곤 합니다”

열정이 전해진 것일까. 그의 말을 듣다보니 기운(그는 ‘성령’이라고 표현하겠지만)이 충만해옴을 느꼈다. 뭔가 꾸준히 활동을 하다보면 눈에 띄게 마련이고 그 활동이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라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순리이다. 그는 이러한 인정을 족쇄로 여기기 보다는 그 넘쳐나는 기운으로 언제라도 봉사로서 되돌려 줄 기세였다.

소아과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우리의 열악한 의료 환경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

“대학 때부터 격오지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이 많았지요. 사람들은 가난했고, 피폐해진 벽지에서 무위도식하거나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곤 했어요. 산아제한이 없던 시절이니 애들은 또 많이 낳았어요. 근데 제대로 키우려고 하기보다는 애들을 물건 대하듯하고요.”

그는 아이들을 치료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제대로 된 치료를 못받아 불구가 될 아이의 운명을 막아 제대로 된 삶을 살게 하는 것, 바로 그의 보람이자 미래에 대한 소중한 투자이다. 고교 시절, 친구들이 소아과 의사를 하면 잘 할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아이들을 좋아한 것도 오늘의 그가 있게 된 바탕이다.

“아이들을 진료할 때 눈높이를 맞추려고 애써요. 아이들이 병원와서 두려워 하는 세 개가 하얀 색, 주사, 엑스레이 같은 큰 기계인데 저는 아예 흰가운을 벗어버리지요. 눕혀놓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이들이 위압감을 느끼기 때문에 낮은 의자에 앉고요. 옆집 아저씨처럼 포근하게 대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부모가 받는 고통을 같이 느끼려고 하니 그를 찾는 이들은 평온한 마음을 얻게 된다. 그러니 병도 빨리 낫곤 한다.

이런 아버지를 옆에서 보고 자라서인지 연세대 의대에 재학 중인 첫째인 규연(25)씨가 소아과를 전공할 예정이다. 둘째인 준현(21)씨도 같은 대학 법대에 다니고 있어 세 가족이 동문이다. 그는 연세대 의대 71학번이다.

교회(정동제일감리교회)활동도 열심이며, 비발디와 바흐같은 바로크 시대 고전 음악도 좋아한다. 글쓰는 일도 틈틈이 해, 의료봉사와 진료 경험을 진솔한 문체로 풀어낸 <고치시는 하나님>과 <병실에 앉은 큰별 이야기>등의 책도 썼다.

우선, 1월 중순 제자들과 목포 장산도로 봉사를 나갈 예정이다.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독거노인, 쉼터 등 의료 사각지대가 지금도 많습니다.”

의약뉴스 김유석 기자(kys@new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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