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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육체의 고백(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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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육체의 고백(1964)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7.3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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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순이 2층으로 오르거나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에 서 있을 때면 그 위풍이 매우 당당하다.

검은 실루엣을 걸치고 강렬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응시할 때면 그가 왜 양공주 사이에서 대통령이나 엄마로 불리는지 이해할만하다. ( 이 장면은 빌리 와일더 감독이 1950년에 선보인 <선셋대로>의 여주인공 노마 대스먼드(글로리아 스완슨)가 영화 출연 제의를 기다리면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

실제로도 그녀는 세 딸의 엄마이기도 하다. 딸 들은 모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마쳤다. 큰 딸(이경희)은 소설가 지망생인 트럭운전수( 김진규)와 사귄다. 둘째딸(김혜정)은 낙제한 영문과 출신으로 성격이 괄괄하다.

대학별 야구경기가 열리면 응원단장으로 활약하는데 재벌 아들이 그녀의 모습에 반해 다가온다. 막내딸은 바이올 니스트로 피아노 연주자와 관계가 좋은 편이다. 엄마는 부산에서 살고 있다.

딸들에게는 양장점을 운영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마담이다. 늙은이나 젊은이 흑인이나 백인을 가리지 않는다. 스스로 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별 짓을 다해서라도 세 딸의 성공을 위한 것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

돈 많은 남자 만나 딸들이 시집가는 것이 마담이 바라는 자식의 성공의 조건이다.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것은 둘 째 딸이다.

몸 파는 것이 힘이 들고 생활이 고단하면 그 딸이 보낸 편지를 읽고 위안을 삼는다. 그녀에게 세 딸은 전부다.

 

그런데 일이 그리 되려는지 둘 째 딸은 재벌 남자에게 차이고 100억대 장모가 되는 꿈은 산산이 부서진다. 

그 딸은 어찌어찌해서 부산 바닥까지 흘러든다. 하필 엄마가 일하는 가계의 맞은편에서 몸을 파는 바걸로 전락한 것이다. 

춤추는 그 모습을 엄마가 본다. 기구한 인생도 이처럼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가난뱅이와 사귄다고 미워했던 큰 딸의 애인은 한국에서는 신춘문예에 거듭 낙방하지만 미국에서는 한국이 낳은 천재작가로 호평을 받고 대성공을 한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라고 대들면서 부모 없는 고아 출신의 가난뱅이 트럭운전사와 결혼한다고 엄마에게 얻어 터져 코피를 흘리던 때를 생각을 하면 격세지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트럭 운전사는 4.19때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다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엄마처럼 발을 저는 불구자 신세다. 그런 애인을 큰 딸은 버리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도와 오늘의 성공을 일궈냈다.

주목받는 음악가로 성공한 막내딸은 거리에 포스터가 붙을 만큼 유명해져 부산 연주 공연 에 왔고 그 공연후 남편이 될 피아노 맨과 시아버지가 있는 서독으로 가 정착할 예정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즈음 마담은 밀수와 불법달러 소지 혐의로 체포돼 3년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소식이 끊긴 엄마를 찾아 부산에 온 딸들은 양장점 운영이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 엄마가 거리의 여자라는 것에 분노를 느낀 막내 딸은 그녀에게 그동안 대학공부 시켜준 돈이라며 집어 던진다.

돈은 열린 창문을 통해 사방으로 흩어진다. 둘째딸은 병으로 먼저 죽는다. 영도다리 아래를 지나는 뱃고동 소리가 조사처럼 들린다. 심신이 망가진 마담 엄마가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죽는 것도 한 발의 총성이 울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내용만큼이나 형식도 드라마틱하다. 마담이 죽었다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골목은 여전히 양쪽에 양공주 하나씩을 끼고 흥청거리는 미군들이 활보하는 공간이다. 세상은 텍사스의 마담이 죽었다고 해서 흔들리거나 바뀌지 않는다.

국가: 한국

감독: 조긍하

출연: 황정순, 김혜정

평점:

 

: 60년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다. 다가올 긴 어둠의 시대를 예견이나 하듯이 꺼지기 직전의 불꽃을 활짝 피워냈다.

김기영, 신상옥, 강대진, 유현목, 이만희, 김수용 등 기라성 같은 감독들이 한국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여기다 이봉래, 이형표, 박상호, 정진우에 이어 조긍하 감독도 이 반열에 끼어들었다. 조긍하 감독의 <육체의 고백>은 당시 한국 사회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그려 크게 호평을 받았다.

작품성에서도 어느 감독에 뒤지지 않을 만큼 완성도를 선보였는데 그것은 과장이나 신파보다는 사실과 현실에 주안점을 둔 시대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부정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시위와 무차별 발포로 인한 사망과 부상, 대학생들의 고뇌와 연애, 먹고 살기 위한 쟁투가 현실보다도 더 처절하게 다가온다.

대사도 거침없다. 부상당한 김진규가 우리는 왜 이런 현실에서 태어났느냐, 내 다리 한 짝이 헛되지 않기를, 하고 울부 짓는다. 서울이 뒤집어 졌다거나 여학생까지 데모에 나섰다거나 4,19를 알리는 신문의 인쇄기가 빠르게 돌아가고 호외를 외치는 장면들이 긴박하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 없이 홀로 세 딸을 키워낸 엄마의 고투는 눈물 없이는 보기 어렵다. 고상하게 꾸미지 않고 환락가의 마담으로 거침없이 등장하는 황정순은 여간 대가 센 게 아니다.

그렇지만 딸들 앞에서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가련한 어미의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자식만큼은 잘 살게 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여인네의 가혹한 운명 앞에서 믿었던 둘 째 딸이 자신과 같이 몸 파는 거리의 여자로 전락했을 때 그녀의 삶은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다.

싸우고 덤비고 고함치고 춤추고 성을 매매하는 과정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이 비현실적이지만 분명히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고 믿을 만큼 전혀 어색하지 않고 되레 현실적이다.

어색한 영어와 금방 들통 날 것 같은 거짓말도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다.

온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리는 카메라의 기교, 키스가 생각보다 깊고 길게 가고 둘째 딸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거나 해변가에서 강간당하는 장면 등이 직설적이라기보다는 떨어진 신발짝이나 흐트러진 옷매무세 등으로 간접 표현하는 기술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그 사이 요즘 뜬 남자 배우 정해인이 음료수를 들고 웃으면서 광고를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유튜브에 올린 영화를 공짜로 보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짜증나는 15초가 아닌 애교 있는 5초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성공에 이르는 공식을 과감하게 벗어난 것만 해도 대단한데 주인공인 둘째딸과 엄마가 죽기까지 하니 조긍하 감독의 <육체의 고백>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하고도 남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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