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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산불(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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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산불(1967)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6.20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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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 초가집이 옹기종기 서 있다. 서로 크기가 다른 것이 두서없이 모여 있는데 보아서 아름답다.

살아 봐서 아는데 사는 것은 불편하지만 어느 이국의 풍경처럼 호기심을 끌어 들일만하다. 이천년 묵은 로마의 돌집이 부럽지 않다.

지금, 이런 곳이 지천에 널려 있다면 일부러 찾아오는 이방인 관광객 때문에 북촌 이상으로 골머리를 앓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때는 전쟁 중이었으니 한가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먹고 사는 문제나 걱정해야 옳다.

김수용 감독의 <산불>은 과연 이런 기대에 부응한다.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혼자가 아니면 으레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어린애가 울고 개가 짖는다. 총소리도 다가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뿐이다. 남자 없는 세상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몹시 궁금하다. 궁금증은 곧 해소된다. 역시 먹고 사는 문제였다.

남자가 있든 없든 그 것은 살아있는 한 죽지 않고 따라 다닌다. 남자들은 죽지 않았다면 산으로 들어가거나 잡혀 가거나 징집 당했다. 그러기 전에 그들은 결혼을 한 상태였다.

 

남아 있는 여자들은 한 번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알지 못해 애간장을 태운다. 무슨 댁이니 성을 앞에 붙인 무슨 과부로 불리는 여자들의 남편은 이미 저승세계로 본적을 옮겨 놓았다.

그래도 산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 먹어야 하고 무언가 사야하고 누군가와 다퉈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 보다 더 중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여성의 성적욕구다.

이미 그것에 대해 경험이 있는 여인들은 날마다 찾아오는 밤이 무섭다. 마음이 불안한 것은 정말 그래서라기보다는 해소되지 못한 욕정 때문이다. 남자의 옷만 봐도 가슴이 벌렁 거린다.

옷만 벗어놓고 나타나지 않는 남자는 오살 맞아 죽어 마땅한 욕을 들어도 싸다. 어느 날 그 곳에 한 사내(신영균) 가 찾아 든다. 여자(주증녀)는 그에게 끌려 정을 통하는데 흐르는 물처럼 거칠게 없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적극적인 것은 배고픔과는 다른 또 다른 오랜 굶주림 때문이었다. 이후 여자는 밤마다 먹을 것을 싸들고 남자가 숨어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꼬리가 길면 잡히면 법이다. 또 다른 여자( 도금봉)가 엉덩이를 턴다고 털었지만 남아 있는 흙을 보고 의구심을 품는다. 나중에 알고는 혼자만 사내 맛을 들이는 것에 분노가 치민다.

재미 본 여자에게 그는 그 남자를 순사에게 고자질 하겠다고 위협한다. 친정사촌 오빠라거나 선생님은 빨갱이와는 다르다고 반박하지만 그것에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재미보지 못하고 재미볼 욕심에 몸이 단 여자는 번갈아 밥을 날라 줄 것을 제의한다. 거부하지 못할 제의를 한 것이다.

두 여자의 눈이 서로 교차하면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분바르고 연기곤지 찍고 사뿐사뿐 걸어온 새로운 여자를 맞은 남자는 자신이 우리에 갇힌 짐승 같은 신세임을 한탄하지만 열 여자 마다 않는 사내인지라 싫지 않은 기색이다.

두 여자는 밥을 미끼로 남자를 능욕하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제 발로 굴을 찾는 여자둘은 사내의 존재를 모르는 대다수 다른 여자들에 비해 호사를 누리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반짝이는 두 눈과 피어나는 얼굴이 그것을 증명한다. 시간이 흘러 두 번 째 여자는 임신을 한다. 토하고 헛구역질을 하는 것이 분명히 그러한 징조다. 사내는 자수의 권유를 죽고 싶지 않고 살고 싶다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또다시 어느 날이 찾아 왔다. 군복을 입은 일단의 군인들이 손에 기름통을 들고 있다. 산에 불을 지르기 위해서다. 대나무로 바구니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여인들은 결사반대하지만 적을 소탕하기 위한 군대의 작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늙은 아비처럼 약방의 감초로 등장하는 첫 번째 여자의 동생인 미친 여자는 먼저 집주변을 불사르고 이어 산불은 사내가 숨어있는 동굴로 번진다.

사내는 불에 타 죽는다. 죽은 시체를 첫 번째 여자가 안고 부둥켜 운다. 그 전에 두 번째 여자는 자살한다. 이 쯤 되면 이 영화는 여인 잔혹사라고 불릴만하다.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만 특히 여자에게 더 그렇다.

여인들만이 사는 마을에서 남자 한 명을 세워 놓고 서로 번갈아 가며 즐기는 <산불>은 차범석의 희곡을 원작으로 했다. 작품성도 뛰어나고 흥행에도 성공했다고 한다. 10년 후 김수용 감독은 똑같은 제목의 영화를 제작했으나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 것 말고는 특별한 변화가 없어 주목받지 못한 리메이크로 남아 있다.

국가: 한국

감독: 김수용

출연: 도금봉, 주증녀, 신영균

평점:

 

: 대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어릴 적 대나무를 먹고 대나무를 타고 대나무를 자르고 쪼갰던 기억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오버랩 됐다.

여름에 거적 대기를 깔고 그 숲에 누워 나무의 끝을 보면 하늘에 걸린 구름 사이로 서걱거리는 작은 소리가 자장가 되어 쉽게 잠이 들었다.

영화에서도 주인공 남녀들이 숲에서 가마니를 깔고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하늘을 보고 일을 치르고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들고 잠이 깬다. 대나무 숲에서 벌이는 과감한 정사와 정사를 빛내는 바람과 햇빛과 하늘은 여자의 만족한 얼굴과 제대로 어울린다.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대신 평화의 봄바람이 세게 불어오고 있다. 예상치 못한 급작스런 변화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남북으로 갈려 한 쪽은 산 사람이 되고 한 쪽은 국방군이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의 역사는 이제 저 멀리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다.

전쟁이 꺼져 버리면 전쟁터로 가는 남자들의 행렬도 멈출 것이다. 그러면 여인들이 떠난 남편을 애타가 기다리는 일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전쟁이 없고 평화만이 이 땅을 지배한다면 <산불> 같은 영화를 더는 볼 수 없어 아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다른 것이 채울 것이니 그런 기대감은 아쉬움을 뛰어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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