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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피아골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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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피아골 (1955)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4.0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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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를 지나면 피아골이다. 골이 깊고 단풍이 좋아 지리산 계곡 중에서도 손꼽을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코스를 이용해 반야봉에 오른다. 계곡의 물소리가 맑고 청하하다. 사계절 어느 때도 좋지만 붉게 물든 가을철에는 행락객의 인파가 대단하다.

저마다 사진 찍기에 바쁜데 유독 이곳의 단풍이 붉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를 먹고 자라서 그렇다고 누군가 그럴싸한 해석을 늘어놓는다.

사실 이 곳은 해방공간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간 전쟁터였다.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은 그 때 그렇게 죽어간 빨치산들의 이야기다.

휴전 후 어느 겨울, 잔당들은 여전히 혁명과업의 완수에 들떠있다. 살아남은 그들은 사상교육을 받고 보급투쟁에 나선다.

줄지어 계곡을 타고 산 속으로 줄행랑을 놓다가 그만 매복에 걸려 든다. 총 맞은 부상병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 가던 무리 중 한 명이 돌아서서 동료를 쏴 죽인다. 데려가서 살리지 않는 잔혹함이 첫 머리를 멋지게 장식한다.

인정머리 없는 그들의 행색은 초라하다. 옷을 찢기고 얼굴은 피골이 상접한데 머리는 산발이라 산 짐승과 다름없다. 여전사도 끼어 있다.

안전한 곳에 이르자 아가리 대장( 이예춘)은 사망자 2명에 부상자 1명이라는 보고에는 아랑곳 하지 않다가 소총 1정 분실이라는 말에는 눈을 부라린다. 눈짓으로 처리를 지시하나 어설프자 직접 권총을 꺼낸다.

얼음 절벽으로 피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탄약 뺏으러 가서 총을 적에게 주었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대장 앞에 누구도 항의하지 못한다. 뱀사골 숙청때는 처단한 반동분자의 창자는 싱겁다며 씹어 먹기까지 했다는 대장동무가 아닌가.

하지만 잠시 휴식을 취할 때면 아가리의 눈을 피해 쫓겨만 다니는 신세를 한탄한다. 공화국과는 선이 끈긴지 오래고 중국은 오지 않고 보급투쟁도 시원치 않다. 해방될 날은 멀고 배는 고프다.

 

이들의 최후가 멀지 않았다. 그래도 살 때까지는 살아야 한다. 여자를 놓고 대장과 철수(김진규)가 경계한다. 철수는 대장이 좋아하는 애란(노경희)말고 다른 여 대원에 눈길을 준다.

애란은 그런 철수에게 끌린다. 철수는 인텔리 출신으로 틈나면 무언가를 쓰고 읽는다. 

어느 날 전북도당에서 간부가 돼지 한 마리를 자루에 담아 온다. 대장은 조국 소련을 위해 위험한 적지에서 무자비하게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공훈장을 받는다.

철수의 생각하는 여자는 일행을 따라 산을 내려간다. 철수는 허탈하다. 다시 투쟁이다. 이번에는 보급 외에 원수를 처단하는 일이 더해졌다.

그 곳 출신 대원도 있지만 부모 형제도 원수같이 저주하라는 대장의 말에 혁명투쟁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

절 입구에 들어선다. 매달린 풍경소리가 고즈넉한 산사에 울려 퍼지고 대원들은 노출된 절 마당에 먼저 나가 적진을 살피는데 주저한다. 하지만 대원들이 모두 절을 접수하고 나서도 적의 공격은 없다.

일행은 남산리로 내려간다. 역시 고요하다. 집요하게 울리는 음악소리가 터질듯한 긴장감을 배가 시킨다. 이윽고 집을 불태우고 총질을 시작한다.

소년병사가 죽어가는 어머니를 껴안고 흐느낀다.

"네가 에미를 쐈지? 아냐, 엄마."

이런 대화가 오고 간다. 이번 투쟁은 성공이다. 쌀과 소를 뺏고 반동분자를 체포했다. 다시 절 마당에 모인 잔당들은 악질을 처단하라고 죽창을 마을 사람에게 건넨다.

애란이 총을 겨누며 어서 하라고 재촉한다. 끝이 날카로운 죽창이 번쩍 칼처럼 하늘로 솟구친다. 반동은 다름 아닌 소년병의 외삼촌이다. 소년병은 그 사실이 들통 나자 살기를 빈다.

대장은 바위를 집어 들고 내려치려 한다. 뒤로 물러나던 소년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떨어진 자리에서 대원들은 모여 아래를 내려다본다.

반동의 피를 사전에 제거해 화를 면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들의 등 뒤로 장엄한 지리산이 말없이 지켜본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능선에서 나무에서 바위에서 계곡에서 참혹한 살인이 계속 이어진다.

대장은 애란에게 여전히 흑심을 품고 있다. 다가가서 수작질이다. 애란은 반항한다. 그리고 노고단에서 젊은 남녀 대원이 처단된 사실을 상기시킨다. 당 규율을 내세우자 대장은 주춤 뒤로 물러선다.

숲의 다른 곳에서는 고민 깊은 철수가 무언가 끄적인다. 고사목 사이로 풀어진 애란이 다가온다. 대장을 내쳤던 애란은 철수에게 살갑다.

철수는 그런 애란을 밀어낸다. 애란은 눈물 가득한 얼굴로 말한다. 평소에도 냉정하고 왜 그렇게 저를 경계하시나요?

애란은 자유롭게 떠다니는 하늘의 구름만 원망할 뿐이다. 내려갔던 여대원이 어느 날 산으로 온다.

지쳤다. 그녀는 쓰러지면서 도당도 파괴되고 지도자 동지도 사살됐음을 알린다. 부추키던 만수(허장강)는 그녀를 겁탈하고 낙엽으로 덮은 죽은 여자를 다른 대원은 들춘다.( 원래는 시간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만수는 자신을 지켜봤던 대원을 목 조르고 다른 대원을 개머리판으로 쳐서 죽인다. 완전 범죄다. 산에 폭탄이 터진다. 공습이 벌어지고 있다. 만수는 창자를 드러내고 죽는다. 철수는 만수의 식량으로 허기를 채운다. 남은 것은 애란에게 준다.

국가: 한국

감독: 이강천

출연: 김애란, 김진규, 허장강, 이예춘

평점:

 

: 애란과 철수는 마지막에 극적으로 화해했다. 애란이 대장을 거부하고 철수를 택한 것은 대단한 용기다. 그녀는 당당했고 최후까지도 그랬다.

대장도 죽고 부상당한 철수를 끌고 벌판으로 나가는 애란의 모습은 잔다르크가 부럽지 않다. 뒤로 굵은 발자국을 선명하게 남기는 애란의 얼굴로 태극기가 겹친다.

자유 대한의 품으로 안기는 애란. 이 장면은 이강천 감독이 용공혐의를 벗고 반공영화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끼워 넣은 것만 같다.

굳이 없어도 될 것을 그렇게 한 것은 그 당시는 1955년이라는 것을 명심하면 이해가 쉽다. 휴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고 실제로 피아골에 한 두 명의 파르티잔들이 살아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런 시기에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은 목숨을 내 거는 일이다. 실재로 상영금지도 있었다고 한다.

군인이나 경찰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빨치산들만이 나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너무 사실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이다. 여기저기 잘려 나간 부분을 완전히 복원하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본 것만 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는다. 연출과 각본과 연기와 촬영이 너무 훌륭하다. 감독은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서울인근이 아닌 지리산에서 직접 촬영했다고 한다.

여자의 욕망과 자기감정에 충실했던 애란을 여전사로 등장시킨 것은 참신하다 못해 대단한 모험이었고 이 모험은 멋지게 성공했다. 지금까지 나온 한국 영화 10선에 당당히 오를 만한 높은 품격을 갖춘 영화다. 철수역의 김진규는 <남부군>의 안성기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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