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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춘몽(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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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춘몽(1965)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3.1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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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풍속, 습도는 물론 체감온도도 자로 잰 듯하다. 무얼 해도 좋은 날이다. 꿈을 꾸기에도 적당하다. 장자가 버드나무에서 호접지몽의 꿈을 꿨다면 바로 이런 봄 날 일 것이다.

이런 좋은 날에 유현목 감독의 <춘몽>을 보는 것도 괜찮다. 제목도 그러하니 보다가 꾸거나 본 다음 꾸거나 보기 전에 꾸거나 본 후에 꿔도 무방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 못해도 상관없다. 내용도 그러하니 피장파장이다.

어느 날이다. 버드나무 가지가 치렁치렁하다. 한 남자가 치과에 들어선다. 그에게 오늘은 이빨빼기 좋은 날이다. 외래에는 서 너 명의 환자가 대기해 있고 곧이어 젊은 여자가 들어온다.

겨우 머리를 들이밀 공간에 이름을 적은 쪽지를 넣고 순서를 기다린다. 짧은 머리의 남자(신성일)는 맞은편에 앉은 곱상한 여자(박수정)를 본다. 느끼하지는 않지만 여자가 보기에 부담스러운 시선이다. 검은 스타킹, 뾰족 구두의 여자는 세련됐다.

 

몸매와 미모도 보통 이상이다. 남자의 시선은 여자의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대기실에서 진료실로 화면은 옮겨진다. 치아 모형물, 기구들, 천장의 조명, 이를 가는 드릴이 번갈아 등장한다.

어설픈 동작의 의사(박암)도 움직인다. 여자와 남자를 번갈아 가며 살피는데 폼이 초보의사다. 서툴게 입안을 들여다보던 의사는 간호사를 불러 주사기를 찾는다. 치료 전에 전신마취를 하는 모양이다.

여자의 약간 도톰한 입술과 새하얀 치아, 골이 깊은 커다란 가슴이 화면에 꽉 찬다. 의자아래서 다리를 교차할 때 검은 스타킹은 관객의 눈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입을 헹구는 여자의 입술 사이로 타액과 섞인 희끄무레한 액체가 꾸역꾸역 빠져 나온다. 선정적이다. 고통인지 즐거움이지 모를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남자는 듣는다.

잠시 후 여자는 팔을 떨어뜨린다. 길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제멋대로 흔들린다. 마취의 순간은 빨리 찾아왔다. 이제 여자는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의사는 여자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눕힌다. 남자도 곧 마취된다. 편히 쉴 수 있도록 여자의 윗옷을 벗겨낸다. 이번에는 산처럼 솟은 그 곳이 화면을 채운다. 검은 브래지어가 흑백화면에서 도드라진다.

하이힐도 벗기고 검은 스타킹도 그렇게 한다. 꿈꾸기에 아주 편한 상태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봄 꿈의 시작이다. 무대에서는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커다란 추상화 한 점을 든 남자는 지배인을 찾는다.

치과의사로 보이는 지팡이를 든 검은 모자의 남자가 여자와 함께 어느 건물로 들어간다. 남자도 따라 들어가려 하나 제지당한다. 유리창 너머로 남자는 여자와 지팡이 남자가 수작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지팡이 남자는 여자를 학대한다. 육체적으로 그러는 것 같고 정신적으로도 그러하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다른 남자는 작은 유리창 너머에서 안절부절 못한다.

침대에 누운 여자를 향해 지팡이 남자는 알쏭달쏭한 말을 한다. '당신 속에 잠재한 그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것은 나를 억제 못해.‘

옷이 반쯤 벗겨져 있는 여자는 치과 의자에서 했던 것처럼 즐거움인지 고통인지 모를 신음 소리를 내뱉고 있다. 표정으로 봐서는 힘든 고통처럼 보이지만 들리는 소리는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다.

지팡이 남자는 걸려 있는 밧줄을 내려 여자의 손목을 앞으로 묶고 조인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는데 남자는 즐겁다. 검은 옷, 검은 모자, 검은 지팡이의 남자는 광대처럼 행동하고 광대처럼 말한다. 무대에서 연출하는 어떤 연극의 한 장면 같다. 여자를 따라왔던 창밖의 남자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지팡이 남자가 권총을 뽑아들고 쏘려는 시늉을 하지만 쏘지는 않는다.

잠시 틈이 생기자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두 남녀는 입을 벌리고 키스 흉내를 낸다.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면 이쪽의 남자가 아닌 치과에서 만난 저쪽의 남자가 분명하다. 그런 몸짓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너무 어색해 억지웃음이 난다.

어디서 봤는지 검은 옷의 남자는 전기 장치를 통해 여자에게 전류를 흘리고 더 센 자극을 위해 다이얼을 돌리면서 억지 웃음을 터트린다.

여자는 비슷한 그 몸짓과 신음 소리를 낸다. 밖에서 구경하는 남자도 그렇지만 관객들도 관음증으로 몸을 조금은 비틀만한 장면이다. 전선의 피복을 벗기는 장면이 길게 이어져 이후 벌어질 전기고문을 상상했던 관객들은 자신이 눕혀 있는 여자를 고문하는 기술자로 착각 할 수 있다.

점점 고조되는 흥분. 그 흥분은 여자의 것인가, 남자의 것인가. 창밖의 남자는 괴롭다.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로 절망하는데 방안의 남녀는 새로운 꿈의 세계로 이동한다.

속이 비치는 속옷차림의 여자는 자신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달린다. 지팡이 든 남자는 뒤따른다. 섹스폰 악기 위주의 기괴한 음악이 보조를 맞춘다.

의도된 연기, 슬랩스틱 코미디가 따로 없다. 권총 대신 장총을 든 남자가 못내 눈에 거슬리는 창밖의 남자를 겨눈다. 이번에도 겨누기만 하지 쏘지는 않는다.

이번에는 여자의 사지가 묶여 있다. 창밖의 남자는 철조망 한 가닥에 가는 길이 막혀 앞으로 가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한다.

장면은 바뀌어 야자수 몇 그루 서 있는 사막 같은 밀폐된 공간에 세 남자가 모여 있다. 여자는 비틀거리다 이유 없이 쓰러지고 모래 장난을 하던 창밖의 남자는 쓰러진 여자를 자국이 선명하도록 질질 끌고 가고 둘은 손잡고 화합하는데 이 모든 것은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이쯤해서 관객들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저 나오는 장면을 보는 것에 만족한다. 육감적인 여자가 남자의 무릎에 안겨 우유보다 걸쭉한 어떤 액체를 억지로 먹다가 양쪽의 입가로 쏟아내는 것을 그저 입을 벌리고 보고 있으면 된다.

둘이 사랑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고 봐도 그 전의 장면이 지금 나오는 장면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또 앞으로 나올 장면과는 어떤 상관이 있는지 알 지 못한다.

입을 적당히 벌리면 들어가련만 조금 열어 흘리게 만들고 흘리는 것을 손가락으로 떠먹이는 장면은 둘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전혀 예측 불허다. 

다만 꿈속을 빠져 나온 남녀는 악수하고 헤어지기보다는 여자가 준비한 차를 타고 함께 이동하면서 막을 내린다. 

검은 장감을 낀 여자의 왼손이 시동을 거는 장면은 타도 되느냐고 묻고 타도 된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감독의 실험영화라고 평론가들이 말하기 전에 포스터만 보고 온 관객들은 실망할 수 있겠다. 포스터는 '완전 이색의 예술 명작'이라고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한국

감독: 유현목

출연: 신성일, 박수정

평점;

 

: 감독은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들지만 때로는 감독 자신을 위해서 만들기도 한다. 아마도 경지에 오른 유현목 감독은 관객보다는 감독 자신의 새로운 실험을 위해 <춘몽>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리얼리티보다는 어떤 환상적 세계를 향해 가는 모험담 같은 것들이 영화에 가득 차 있다. 전위적 형식이나 부조리 혹은 자의식 과잉이니 시공을 초월한다는 표현은 충분히 나올만하다.

치과 드릴 장면이 보이다 땅을 파는 착암기로 교차 되는 편집은 감독이 원하던 바다. 포르노에 비견될 만한 일본 원작을 참고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여배우의 노출신이 그 당시로는 파격적이다.

특히 수 초간 벗은 뒷모습이 노출돼 감독은 음란죄로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꿈속을 헤매는 이색적인 백화점 세트장은 독일 표현주의 의 영향을 받았다. 대사도 거의 없어 영화관에서 판토마임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영화는, 몰라도 아는 척 하거나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냥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 좋다. 굳이 하고 싶다면 봄에는 대개 이런 꿈을 꾸지 않느냐고 되묻거나 나도 간혹 이런 꿈을 꾼다고 대답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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