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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 있으니 올라가고 길 있으니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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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 있으니 올라가고 길 있으니 달린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3.13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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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운동을 하면서 잔기술을 들먹일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봉주가 되려는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무작정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 들 다시 말해 기본자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자세다. 무슨 일을 하건 자세가 중요하지 않은가. 자세가 돼있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내가 상관할 일이다. 나는 오랫동안 쉬지 않고 이 일을 하려고 아무 생각없이 시작한 첫 날부터 작정했다.

해보니까 좋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은 추억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달리기의 그런 추억도 있었다. 40년 하고도 훌쩍 지난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날은 나에게 이기는 것이 어떤 기분이 드는 것인지 알게 해주는 날이었다.

공부해서 맨 앞에 서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달려 나가서 상대를 앞서는 것은 쉬웠다. 무엇보다 이인은 스타트가 빨랐다. 100미터가 안 나오는 시골 운동장에서 먼저 달리는 것은 비슷한 실력의 경우 반드시 제일 먼저 골인하게 마련이다.

스타트 선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면 오색무지개가 비온 뒤가 아니어도 걸려 있었다. 바로 만국기였다. 만국기는 나에게 오색무지개와 다름없었다.

만국기를 한 번 쳐다보고 귀를 기울이면 바로 탕 소리가 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손등에 1등 스탭프 표시를 박은 뒤 시상대로 가면 공책 다섯 권을 주었다.

상이라고 한자로 써진 붉은 글씨를 보는 것은 보아서 아름아운 일이었다. 불룩 솟아오른 쇠똥구리의 집을 발포 차면서 내친 기분으로 황토배기 언덕에 올라서면 멀리 함석집에서 불난 듯이 붉은 노을이 비쳐 들었다.

반사적으로 이인은 운동회 때보다도 더 빨리 달려간다. 등에 매단 보자기로 싼 책보가 덜 덩렁거린다. 공책 때문이다. 헉헉대며 집에 들어서면 럭키가 꼬리를 흔들면서 먼저 달려드는데 언젠가는 이 녀석과 시합을 해도 이길 것 같은 기운이 넘쳐흐른다.

행복한 달리기의 추억이다. 다른 기억도 있다. 이 기억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 힘든 시기였다. 나에게도 그랬지만 나의 동료들도 그랬다. 그들은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밀물 때 숨을 곳을 파며 내품었던 엄지발가락이 붉은 황발이와 쟁기질에 지친 황소가 입에 문 것처럼 그런 것을 게도 아니고 황소도 아닌 사람이 물었다. 훈련이라고 했다.

위통을 벗고 손뼉을 치거나 군가를 부르면서 쉬지 않고 말고개 언덕을 치고 올라갔다. 달리기의 가장 적합한 속도라는 옆 사람과 대화는 불가능할 정도로 빨리 달렸다. 맨몸의 어깨에는 야삽과 판초우의를 단 군장이 게딱지처럼 달려 덩렁거렸다.

세상에서 아니 군대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낙오자라는 말을 귀로 듣지 않기 위해 누구나 게거품을 물었다. 옆 사람의 입가에 서린 얼음 같은 거품을 보며 서로 웃었다. 웃었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살기 위한 절망적인 울음이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몸이 무거워도 쉬지 않고 앞으로 내달릴 수 있었다. 나아가는 힘은 좋은 추억이 아니라 군대의 구보에 있었다. 한 겨울 얼음장을 깨고 나와서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내달렸던 추억은 강원도 어느 깊은 계곡에서 여전히 메아리쳤다.

그 때처럼 어깨를 크게 흔들거나 하늘을 보려고 고개를 들 필요가 이제는 없다. 그저 꼿꼿하게 자존심을 세울 정도만큼만 들면 됐다. 이때 가슴과 허리는 구부리지 않고 펴야 한다.

엉덩이는 뒤로 빼지 말고 앞으로 당기고 무릎은 걷는 정도의 높이로 아니면 그 보다 조금만 높이면 된다. 이 정도 자세를 유지하면 새로운 자세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 이런 자세로 나는 오늘도 달린다.

개천의 얼음이 녹았다. 주변의 나무는 싹이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만 같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달려야 한다. 이유는 묻지 말라. 왜 달리느냐고. 산이 거기 있느니 올라가는 것처럼 길이 있으니 달리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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