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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돈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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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돈 (1958)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3.02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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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이 정도면 노골적이다. 제목도 그렇지만 내용도 그렇다. 에둘러 가지 않고 신작로처럼 직선으로 곧장 뻗는다.

김소동 감독은 <돈> ( The Money)을 통해 전쟁 후 피폐한 농촌생활을 사실대로 그렸다. 리얼리티가 물씬 풍겨난다는 말이다. 보다보면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세대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도 도시나 농촌이나 돈이 필요했다. 살기 위해서, 혼인하기 위해서, 빚을 갚고 쌀을 먹기 위해서 '머니 머니 해도 머니'가 최고인 돈이 필요했다.

다른 건 몰라도 농사짓는 사람이 웬 쌀 걱정이냐고 할 테지만 소작농들에게 쌀은 제 손으로 생산했어도 고리돈 내고 사먹어야 하는 호구 음식이다.

덥수룩한 수염이 산 도적을 연상시키는 봉수(김승호)는 생긴 것과는 달리 순박하고 우직하고 의리가 있는 한 마디로 치면 된 사람이다. 그에게는 과년이 딸이 있다. 동네 친구 아들과 혼사가 예정돼 있는데 이번에는 더는 미루기 어렵다.

벌써 두 번이나 '그 놈의 우라질 돈' 때문에 날짜를 어겼기 때문이다. 가을들판은 추수를 끝내는 손길로 분주하고 순찰을 도는 순경(경찰)이 제복을 입고 아는 체를 한다.

 

용모도 준수하고 하는 말이나 움직이는 몸가짐이 조심스럽다. ( 하지만 초반부터 경찰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슨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인다.)

낫을 허리춤에 차고 곰방대를 물고 잠시 새참을 먹기 위해 모여서 쉬는 모습이 내가 유년 시절에 봐왔던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멀리서 검은 기차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달려가는데 벌써 두 시인가 하는 말로 보아 배가 고플 참이다. ( 열차는 순경과 함께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다 보고 나서 알았다.)

군인 간 봉수의 아들 영호 (김진규)가 더블백보다 작은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들어선다. ( 소위로 들어갔으나 계급장도 달려 있지 않고 말도 없어 제대 시 계급을 알 수는 없다. 훈련으로 단련된 몸이 전투복에 잘 어울린다.)

여동생의 친구 옥경(최은희)은 그가 입대 전에 사귄 처녀로 장래를 약속한 것으로 보인다. 봉수는 딸도 혼사를 시켜야 하고 며느리도 맞아야 하는 겹 혼사에 즐겁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있으면 호랑이도 부린다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농사도 흉년이고 살림은 늘기보다는 빚만 쌓여 간다고 어머니는 한탄한다. 1년 내내 뼈가 부서지게 일해도 워낙 농사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 현실을 개탄한다. 네 식구가 힘을 합치면 안 될 것도 없고 취직해 영농자금을 빌려서 차근차근 복구하자고 그런 어머니를 영호는 위로한다.

걱정도 잠시 영호는 보이지 않는 옥경이가 어디 갔는지 두리번거린다. 모친이 일찍 죽고 영호 네서 살았는데 그 사이 어디로 갔나 의심이 번쩍 든다.

영호로부터 왜 그랬느냐는 핀잔을 들었지만 모친은 살림형편 때문에 옆집 과부댁으로 보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옥경은 기생이나 정식 접대부라기보다는 그 집에 더부살이로 간혹 술심부름을 하거나 식모처럼 집안 살림을 돕는다.)

그 집에는 과부의 기둥서방인지 그 비슷한 역할을 하는 억조( 최남현)가 있다. 봉수와 친구 사이인 억조는 돈도 많고 호탕하고 사기 놀음에 도사다.

과부댁도 여간내기가 아니어서 봉수 네가 돈을 꾸기 위해 쌀가마를 들여 놓자 '농사짓는 사람들은 얼마나 재미날까, 돈 쓰고 싶으면 금방 생기니', 하고 염장을 팍 지른다. ('봄 여름 가을, 황소처럼 일하고도 개 값인데 퍽이나 재미 지겠소'! 라는 말은 들은체하지 않는다.)

긴긴 밤 봉수 등 친구들이 억조 네에 둘러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그들은 고리이자로 억조에게 돈을 빌리기도 하고 기분이 나면 '한 번 뽑자'( 놀음하는 것)고 판을 벌인다. ( 그 때 봉수네 집에서는 딸이 시집 안 간다고 울고 바느질 하던 엄마도 같이 운다. 이번에도 식을 올리지 못하면 파혼당할 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영호와 옥경은 덤불 속에 같이 누워 돈 걱정도 하고 미래 일도 세우면서 사랑질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놀이로 시작한 판은 점점 커진다. 이날따라 봉수는 운수대통이다. 끗발이 척척 붙어 판돈을 쓸어 모은다. 그렇지만 친구 돈을 따는 것이 영 마음 내키지 않는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돈을 돌려주려 하나 억조가 그런 것이 아니라하고 미래 사돈인 친구나 다른 친구도 받기를 거부한다. 

대신 판은 계속 돌고 봉수는 그 때마다 나락 걷어 들이듯이 돈 걷느라 정신이 없다. ( 이 때 순경이 야간 순찰을 돈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 오싹하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은 흩어진다. 봉수의 수염이 위로 올라간다. 웃음도 덩달아 나온다. 하지만 영호는 버럭 화를 낸다. 부인도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돌려주기를 원한다. 봉수는 다시 돈을 들고 어둠 속으로 들어선다.

억조가 밖에 있다 사연을 듣고 '이 세상에 돈 없이 살 수 없다'며 착한 봉수를 나무란다. 그리고 술 한 잔 더 먹자고 끌어 들인다. 술잔이 오가다 놀음이란 잘 붙을 때 하는 거고 자넨 잃어야 공돈이라 본전이고 나는 생돈 나가는 것이니 한 판 더 하자고 꼬드긴다.

두 사람의 진검 승부는 손쉽게 끝난다.

소맷자락 속에 화투짝을 숨겨 놓은 억조를 아무리 운이 좋은 봉수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딴 돈을 다 잃고 꾼 돈까지 잃는다. 눈이 뒤집힌 봉수는 이제 그만하자는 억조에게 하다가 그만 두는 수가 어디 있느냐, 잃은 사람 생각도 하라고 노려보지만 닭은 울고 날은 밝아 온다.

끝장내자고 덤볐지만 정작 손 털린 사람은 개평으로 받은 푼돈을 손에 쥐고 망연자실해 하는 봉수다. ( 봉수의 눈과 그것을 제압하는 억조의 표정이 일촉즉발이다. 언제 터질까 오금이 저린다.)

큰 돈을 벌었다 되레 빚만 진 봉수의 마음은 한 번이라도 화투짝을 쥐어 본 사람은 안다. 땄다가 잃었을 때는 딸 뜻 말 뜻 조여드는 흥분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봉수의 기분이 엉망일 때 억조는 신바람이 나서 옥경이 에게 인심을 쓴다.

싫다는 것을 손을 잡고 억지로 치마 주머니에 돈을 찔러 넣는다. 그러면서 노리던 수작질을 해보는데 그만 과부댁에 들켜 더 이상 어쩌지 못한다.

장면이 바뀌면 봉수는 또 다른 이웃에게 빚 독촉을 받는다. 목을 뽑아가라 거나 집을 떠 가라도 버텨 보지만 속은 마른 논 타들어 가듯이 말라간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남은 송아지를 파는 것. ( 소나무가 멋지게 늘어선 행 길을 따라 봉수가 차려 입고 읍내를 가는데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경찰과 또 마주친다.)

판 돈으로 구제물품을 사서 그 까짓 돈 좀 벌어 보기 위해서 나서는 봉수의 앞길에 신의 가호가 있을까. 음식점에서 봉수는 인생역전을 할 기막힌 여자를 만난다. 봉수에게 맥주를 흔들어 일부러 얼굴에 쏟아 붓던 여자는 오빠라는 남자와 짜고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을 가짜 돈과 맞바꾼다.

5만원을 주고 10만원을 벌었으니 빌린 돈을 갚고도 남았다고 얼굴에 흡족한 표정을 짓던 봉수는 풀린 전대 속에 종이뿐인 가짜 돈을 들고 꺼이꺼이 짐승 같은 울음을 터트린다. ( 봉수 같이 순진한 인간이 돈 벌고 사는 세상이 아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봉수가 몰랐을 리 없지만 그 순진한 탓에 순간적으로 판단 실수가 일어난 것이다.)

농사짓는 봉수의 실패담은 여기서 끝내자. 더 말한 들 봉수가 돈을 왕짱 벌어 부자가 될 싹 수가 보이지 않는다.

감독도 그런 당치않은 설정을 하지 않을 것이고 (손기현 원작이다.) 뭘 좀 아는 관객들도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알맹이 없는 신파극도 아니고 느닷없이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권선징악의 영화도 아니다.

시종일관 탄탄하고 짜임새 있고 연기력이 일품인 이런 영화가 1958년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졌다.

국가: 한국

감독: 김소동

출연: 김승호, 최남연, 최은희, 김진규

평점:

 

: 영화를 보는 내내 불안했다. 언제, 어느 때 등에 걸친 굽은 낫으로 누가, 다른 누구를 푹 찌르게 될 지 손 발이 다 떨렸다. 필시 누군가는 죽을 것이다.

그가 봉수가 될 지 억조가 될 지 아니면 설 쇠면 21살이 되는 옥경이가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봉수가 돈 떨어지고 정신 줄 놓을 때 억조는 남의 불행은 아랑곳없이 술 취해 지화자 타령을 부르며 흥이 났다. 슬쩍 옥경이가 자는 곳을 보니 목울대가 울렁거리고 찢어진 눈은 더욱 가늘어 진다.

실랑이 하다 도망치고 쫒다 허탕치고 그 사이에 허리춤에 찬 전대의 돈이 마당에 낙엽 떨어지듯 떨어진다. 마침 지나가던 봉수가 주워 담는데 억조가 내 돈이라고 고함을 지른다.

'돈은 주인이 없어, 이놈아, 돈은 돌고 돌아.'

 이 순간만큼은 봉수도 질 리가 없다. ( 이 때 봉수가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얼굴이 들어간 돈을 밟았다고 해서 문제가 됐다고 한다. )

서로 엉켜 싸운다. 어느 새 억조 손에 칼이 있고 억조는 싸우다 그 칼에 등을 찔려 죽는다. 도망갔던 옥경이는 집으로 오다 돈을 어렵지 않게 치마폭에 주어 담고 나중에 만나기로 영호와 약조하고 서울행을 결심한다.

새벽 첫 차를 타기 위해 옥경이 서성인다. 어디서 개 짖는 소리 대신 경적 음이 길게 울린다. 영호도 기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대합실로 들어선다.

두 사람 무사히 기차를 타고 사건 현장을 빠져 나갔을까. 그래서 서울서 잘 사는, 반쯤은 해피하게 마무리 됐을까. 그것 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떠나는 기차 꽁무니를 따라가면서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돈 때문'이라고 절규하는 장면은 시빗거리를 걸기 보다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야 하는 장면이다.

이 멋지고 스릴 넘치는 영화를 만든 감독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우리나라 첫 수출 영화 (나운규의 20주기 추모작 <아리랑>)를 감독한 김소동 이라고 한 번 더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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