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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가스등(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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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가스등(1944)
  • 의약뉴스
  • 승인 2017.04.2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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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에 전기가 들어왔고 방마다 형광등이 달렸다. 신기한 것은 둘째 치고 안방 불을 켜면 건넌방 불빛이 적어지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문을 잠그고 방안에 틀어 박혀 있어도 누가 다른 방에 불을 켜면 이내 알아챘다. 사람이 들어왔고 누군가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는 사실을.

긴장을 하거나 긴장을 푸는 것은 언제나 형광등 불빛의 세기였다. 어른들은 형광등을 매만지듯 쳐다보면서 전기부족 때문이라고 전기를 아끼라고 닦달했다.

그런 줄 알았고 글자가 안 보일 정도로 껌껌해서야 형광등을 켜고 컸다. 이제는 까마득히 사라진 추억이다. 그러던 것이 조지 쿠커 감독의 <가스등>( Gaslight)을 보자 새록새록 과거가 되살아났다.

그레고리( 샤를 보와이에)가 다락방으로 몰래 들어온 것을 거실의 부인 폴라( 잉그리드 버그만)가 의심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스등의 불빛이 갑자기 작아 졌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당시 가스가 부족했나.)

어찌됐든 형광빛의 세기가 줄어든 것은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단서의 하나로 작용한다. 사건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가스등>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풀리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폴라는 그레고리를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났다. (사실 그레고리는 폴라를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유명한 오페라 가수인 이모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고 유일한 상속녀인 폴라가 성악 수업을 위해 그곳으로 갔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반주하던 그레고리와 폴라는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영국으로 돌아와 이모가 살던 빈집으로 들어간다. 10년 만이다. 폴라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살인의 추억 때문에 꺼려했지만 예술보다 더 사랑하는 그레고리가 원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귀신들렸다는 이웃의 수군거림도 무시하고 그곳에 신혼집을 차렸다.

사랑할 때 두 사람은 행복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그레고리의 행동이 점차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상한 것은 폴라였는지도 모른다. 폴라가 멀쩡한데도 그레고리는 그녀가 아프다는 이유로 이웃의 방문을 거절하고 역시 같은 이유로 외출을 막는 일이 잦아지자 폴라는 자신이 정말 아픈 것으로 착각한다.

무언가를 곧잘 잃어버리는가 하면 하인을 의심하기도 하고 헛것을 보기도 한다. 잃어버린 브로치나 시계, 벽에 걸린 작은 그림이 사라진 것은 모두 폴라의 탓이다.

 

그레고리는 당신 엄마도 정신병자였다며 그녀를 몰아 부친다. 자신감을 상실한 폴라에게 위기가 닥친다. 그레고리는 아내의 체면은 아랑곳없이 하인 앞에서 그녀의 기억을 탓한다. 두려움과 공포가 폴리를 덮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남편 그레고리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작업을 핑계로 늦은 밤 밖으로 나가 빈집을 통해 자신의 다락방으로 숨어들었다. 폴라는 그 사실을 알아 못했다. 심지어 자신이 미쳤기 때문에 잘못 보는 것으로 착각했다.

꼬마시절 폴라의 이모인 오페라 가수의 열성 팬이었던 형사 브라이언( 죠셉 코트)은 그레고리를 의심했다. 목 졸려 죽은 살인사건이 용의자로 그를 지목한 것이다. 보초를 통해 이른 새벽 거리를 돌아다닌다는 보고를 듣고는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진다.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그레고리의 말을 실천하는 젊은 하녀를 따돌린 형사는 폴라와 함께 있는 동안 가스등이 희미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그레고리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의 주인공이라는 사실도 알아챈다.

폴라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형사가 입증하자 자신감을 갖고 그동안의 사건을 되돌아본다. 미친 것이 아니라 조금씩 미친 여자로 몰렸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사건은 풀린다. 보석 수집광이었던 그레고리는 이모가 남긴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폴라에게 접근했고 빈집으로 이사했던 것이다. 그는 밤마다 다락방에 올라 이모가 남긴 물건들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보석을 찾았다. 의자의 쿠션이나 깊은 장롱속이 아닌 바로 그녀가 입던 옷에 달려 있는 액세서리가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짜 보석이었던 것이다.

범죄가 탄로 나고 의자에 묶인 그는 범죄자의 마지막 도피처가 애국심이듯이 사랑이라는 무기로 그녀에게 칼로 줄을 풀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그의 명령은 이번에는 통하지 않는다.

안개 낀 영국의 골목길을 밝히는 희미한 가스등 불빛 아래 광장으로 향하는 마차 소리와 범인의 황망한 발걸음, 그 뒤를 미행하는 형사의 모습에서 오싹한 소름이 돋는다. 과연 스릴러의 고전답다.

국가: 영국

감독: 조지 쿠커

출연: 잉글리드 버그만, 샤를 보와이에, 죠셉 코튼

평점:

 

팁: 물오른 잉글리드 버그만의 연기가 볼만하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몽유병 환자 같은 연기를 할 때면 그녀가 진짜 미친 여자처럼 보인다. 흑백화면 속에 밀랍인형처럼 굳어 있을 때면 얼른 범인이 잡혔으면 하는 조바심이 일기도 한다. 사랑을 할 때 시도 때도 없이 키스를 해대던 행복하던 그 시절의 그 얼굴은 런던으로 이사한 후에는 한 번도 볼 수 없다.

가슴골이 보이는 깊이 패인 의상도 그녀를 돋보이게 하기 보다는 곧 터질 것 같은 불안을 암시하는 듯하다. 처음에 다정하게 굴던 샤를 보와이에는 점차 살기 띤 표정으로 바뀌는데 무표정하게 아내를 대하는 태도는 살인마다운 연기로 어울렸다.

거실에서 오르는 계단을 통해 그냥 다락방으로 가면 될 것을 굳이 새벽에 나가서 빈집을 통해 자기 집으로 숨어드느냐고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영화의 긴장감을 구성하는 이런 극적 요소는 아내가 심리적으로 위축될 소지를 만들기 위한 장치로 적절히 쓰였기 때문이다. 안개 낀 새벽 3시. 중절모를 쓴 중년의 사내가 자기 집을 나가고 그 뒤를 쫒는 형사의 모습은 흑백화면의 무거움을 더욱 음습하게 만든다.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나쁜 남자 이야기가 오래전 남의나라 영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무시해 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없으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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